수업자료- 자사의 중용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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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논술샘 작성일07-11-25 11:44 조회22,30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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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思의 中庸人觀 아리스토텔레스 中庸人觀의 비교-
참고문헌 : 『동서철학의 비교』 목영해 著, 교육과학사, 1992
Ⅰ. 들어가는 말
현대인류문화 속에서는 극한의 논리, 극단의 논리가 주도적인 문화논리로 통용되 고 있다. 게다가 현대인들의 사고방식 및 행동양식에서 또한 어떠한 주의나 주장이
비타협적인 극단의 것일수록 선명하다, 순수하다는 이름아래 선호되어지며, 극단적인 인 행위 또한 실험적이다, 창조적이다, 전위적이다라는 미명아래 미화되어지기도 한
다.
그런데 極의 논리는 그것이 갖는 생산성, 편의성, 광고성, 선동성만큼이나 역기능
적 부작용 또한 크다. 極의 논리는 자연스러운 인간존재, 인간의 자연스러운 삶의 양 식, 인간의 자연스러운 사고방식을 인위적으로 극소화하거나 극대화하는 비인간적인 논리이며, 따라서 극한인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존재양식에 충실하기를 거역하는 비 본질적 존재자이다.
인류는 極의 논리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생활논리 및 이 새로운 논리에 입각 한 새로운 인간적 문화를 재건할 인간상을 정립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점에서
중용의 논리 및 중용의 논리에 입각한 삶을 영위하는 ‘중용인상’을 논의하는 일은 매 우 의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중용이란 ‘어느 쪽으로든지 치우침이 없이 中正함’이라는 국어 대사전의 정의나 ‘양 극단 사이의 중간을 차지함’ 이라는 혼비 영어사전의 정의에서도 일견할 수 있는 바 와 같이 중용의 논리는 많은 문제점을 가진 極의 논리를 대신할 수 있는 삶의 논리 로서 동아시아 문화권의 子思와 서양문화권 아리스토텔레스가 中庸을 주장한 이래 중 용적 행위는 바람직한 이상적 행위로, 중용인은 모든 인간이 지향하여야 할 이상적 인간상으로 오랫동안 수용되어져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極의 논리가 주도적인 문화논리로 통용되는 현대사회에서 중용 의 논리는 기회주의적, 편의주즤적, 막연히 추상적, 현실성이 없는 이상주의적 논리 이며 중용인 또한 기회주의자, 회색분자라고 비판되어진다. 그러나 중용의 논리 및 중용인에 대한 비판은 중용에 대한 시원적 본질적인 고찰없이 중용을 막연한 중간의 논리 또는 산술적 평균의 논리라고 생각하는 데에서 주로 기인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중용에 대한 시원적 본질적 고찰에는 동아시아 중용관의 시원인 子思의 중용관과 서 양 중용관의 시원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관이 종합적으로 비교, 검토, 토의되어져 야 할 것이다.
Ⅱ. 子思의 中庸觀
1. 中庸의 정의
주자는 中에 대하여 주석하기를 ‘中은 치우치지도 의존하지도 않음’또는 ‘中은 넘 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음’이라고 하였다. 이 주석 중에 ‘中은 치우치지도 의존하지도 않음’이라는 해석은 본체론적 측면에 관한 표현으로서 본체론적 中의 존재양식은 결코 치우치지 않는, 따라서 모든 것을 다 포용할 수 있는 중립성을 그 특징으로 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中이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음’이라는 해석은 中이 갖는 실체론적 측면에 관한 표현이다. 위 본체론적 측면의 中을 그 體라고 할 때 실제 운용적 측면의 中은 그 用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中의 개념은 體의 측면과 用의 측면을 겸비하여 구성된다.
庸은 體的 의미보다는 用的 의미가 부각되어져 있는 개념이다. 결국 庸은 中이 갖
는 用측면의 보완적 설명으로, 中이 변함없이 실현되어짐 다시 말해 최선의 이상적 적합성이 변함없이 지속되어짐을 의미한다. 中에다 庸을 더함은 기왕에 존재 하는 中 개념의 실천적 강화일 따름이다.
따라서 子思에 있어서 중용이란 존재자 특히 인간의 존재양식과 존재구현 형태가 항상 변함없이 결코 치우치지도 의존하지도 않는 포용적 중립성과 넘치지도 모자라 지도 않는 최선의 이상적 적합성을 가짐을 의미한다.
2. 中庸人像
1) 도덕적 인간
중용의 첫 구절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하늘의 명한 것을 性이라 하고, 性을 따
르는 것을 道라 하며, 道를 닦는 것을 敎라고 한다. 위 진술에 의하면 子思에 있어서
교육이란 道 닦는 일 즉 인간의 도리를 정확히 인식하고 이를 지키고자 하는 일이다.
‘子思는 中이 천하의 큰 근본이다’ 라고 하여 中의 본질적 의미를 규정하고, 주자는 子思의 이 규정을 해설하여 ‘큰 근본이라 함은 하늘이 명한 성품과 천하의 이치가 모 두 이로부터 나옴을 가르침이니 道의 체로서 中을 이름이다’ 라고 하였다. 인간의 도 덕적 주체성을 실현하는 일상적인 삶 속의 개별행위에 앞서 그 행위주체가 편견이나 아집으로부터 벗어나 도덕적 존재규칙을 지키겠다는 개방된 마음자세와 함께 존재규 칙을 지켜 나가기 위한 여러 내면적 조건이 고루 갖추어져 편벽되거나 부족함이 없는 상태가 中이라는 것이다.
중용이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선천적인 性이 삶의 과정 속에서 지속적으로 발현 됨으로써 인간의 도덕적 존재완성을 이루는 일이다. 따라서 性을 그 내면적 규칙에 의거하여 발휘하는 사람이 곧 중용인이자 도덕적 인간이다.
2) 창조적 조화인
인간은 性의 조화로운 발현을 통한 창조적 직관지의 능력을 가짐으로 인하여 자신 의 도덕적 존재완성 뿐만 아니라 타인의 존재완성 및 사물의 존재완성 더 나아가 궁 극적으로는 우주의 창조적 완성에까지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자신의 性 뿐만 아니라 타인 및 사물의 性 발현, 더 나아가 우주의 창조적 완성을 가능하게 하 는 창조적 직관력은 도덕적 주체로서의 한 인간이 중용을 취할 때 비로소 가질 수 있다. 다시 말해 자기 중심적인 편견이나 자기만을 위하겠다는 아집으로부터 벗어나 개방된 자세 그리고 사리사욕에 치우치거나 그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은 포용적 중립 성을 가질 때 인간은 창조적 직관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3) 성실한 인간
子思는 도덕적 심성으로서 性을 다 발현하여 도덕적으로 완성된 인간이 되기 위해 서는 마땅히 誠함 속에서 性을 발현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性의 발현은 誠 그 자체만을 목적으로 할 때 가장 잘 이루어지고, 誠 자체를 발현의 내 용으로 할 때 가장 잘 이루어지며, 性의 태도나 자세를 가질 때 가장 잘 이루어진다 는 것이다.
그러면 誠함 속에서 性을 발현케한다고 함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性을 발현함을 의 미하는가? 誠함 속에서 性을 발현함은 天이 순수한 동기에서 만물 그 자체를 위하여 만물을 창조하였듯, 사리사욕을 개입시키거나 이해관계를 따지지 아니하는 순수한 동 기에서 무조건적으로 그 발현이 이루어져야 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견지에서 子思는 ‘誠함이 곧 하늘의 道’라고 하였고, 주자는 이를 해설하여 ‘誠함이란 진실하여 망령됨 이 없는 것을 말한다’고 하였다.
이와 함께 子思에 의하면 誠함 속에서 性을 발현함은 때를 맞추어 性을 발현함을 의미한다. 性의 발현에 있어 때를 맞추어 誠한다고 함은 時中과 같은 의미의 것으로
時中이란 자기를 상황 속에 맞추어 넣는 주관적 판단이나 자기나름의 처신 즉 수시 로 변화하는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하여 부단히 자기의 中을 새로이 설정하고 최적의 대응책을 마련함을 의미한다. 예컨데, 때를 맞춘 誠함 속에서 性을 발현함이란 부귀 에 처하였을 때에는 부귀를 행하고 빈천에 처하였을 때에는 빈천을 행하며 오랑캐에 처하여서는 오랑캐를 행하고 환난에 처하여서는 환난을 행하여 들어가는데 마다 스스
로 얻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4) 봉사적 참여인
子思에 의하면 중용인이란 자신만의 도덕적 존재완성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결 코 아니다. 그에 의하면 중용인은 자신의 性 뿐만 아니라 타인의 性 발현까지도 책임 지는 사람이며 더 나아가 이상적 도덕사회의 건설까지도 책임지는 사람으로서, 중용 인은 창조적 직관지의 능력을 통하여 이 일을 기꺼이 이루어낸다.
그렇다고 하여 중용인의 사회참여가 도덕적 존재완성이라는 자신의 본분을 저버린 채 사회참여에 뛰어드는 일이 아니다. 子思는 이것을 ‘군자는 和하나 不流하다’고 이 르고 이 진술을 ‘군자는 중인들과 융화하나 동화되지는 않고 소인은 동화되나 융화되 지는 못한다.’(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는 공자의 진술과 결부할 때, 선천적 性을 조화롭게 발현한 중용인은 자신의 내면적 조화 즉 도덕적 주체성을 깨뜨리지 않고 타 인과의 창조적 화합을 추구하는 인간이며, 이를 통하여 이상적 도덕사회 완성이라는 자신의 책무를 다하고자 하는 인간이다.
이상과 같이 子思의 中庸人像은 도덕적 인간, 성실한 인간, 창조적 조화인, 봉사적 참여인으로 구체화된다. 그리고 子思는 이 인간상에 가장 근접하여 있는 현실적 인간 으로 ‘군자’를 지칭한다.
Ⅲ. 아리스토텔레스의 中庸觀
1. 중용의 정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은 우리와의 관계 속에서의 중용이라고 진술하여 그에게 있어서 중용이란 기계적 산술논리에 있어서의 중간이 아닌 삶의 논리에 있어서 중 간이란 의미의 것임을 명확히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중용이란 산술적 중 앙이나 이것도 저것도 아닌 미지근한 태도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삶을 영위하는 중에 이루어진 행위가 가치론적 절정에 해당하는 一點을 이룬 상태를 말하는 것이 다. 물론 이 일은 원의 중심을 발견하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듯 결코 쉬운 일이 아 니다. 올바른 사람에게 올바른 정도로, 올바른 시기에 올바른 동기에서, 올바른 방법 으로 행위한다는 일이 결코 누구나가 할 수 있는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적 일점을 발견하는 데 도움이 되는 세가지 규칙을 다 음과 같이 제시하기도 한다. 첫째, 중용에 대하여 한층 반대가 되는 극단에서 멀리 피할 것. 둘째, 우리의 자연적 성향에 반대가 되는 경향에로 우리 자신을 둘 것.
셋째, 중용의 발견이 곤란할 경우에는 두 악 가운데 중용에 더 가까운 상태를 택할 것. 그러나 이 규칙들은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것에 지나지 않으며 중용적 일점을 발 견하는 논리적 원리는 아니다. 一點으로서의 중용의 궁극적인 파악은 직관적 통찰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
2. 中庸人像
1) 이성적 인간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중용은 德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에게 있어 덕은 중 간이 되는 것을 목적으로 삼기 때문에 덕은 일종의 중용이며 덕은 중간의 것을 발견 하고 취하기 때문에 그 본체에 있어서나 그 본질을 진술하는 정의에 있어서나 덕은 하나의 중용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덕이란 어떠한 생명체가 생을 영위하기 위하여 자신의 생 명적 기능을 가장 잘 발휘함으로써 자신의 존재의미를 실현 완성하는 일을 말한다. 그러면 인간은 어떤 기능을 가지고 있는가? 인간이 삶을 영위하기 위하여 가지고 있 는 기능을 크게 나누면 첫째, 영양기능 둘째, 욕구기능 셋째, 이성기능의 세가지이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영양기능이나 욕구기능은 식물이나 동물도 가지고 있는 하급기능으로서, 식물이나 동물이 가지고 있지 못한 인간만이 가진, 따라서 인 간을 인간답게 하는 인간본질적 생명의 기능은 이성기능이다.
이성활동이란 사물의 이치를 인식하고 이 인식에 근거한 올바른 행동계획을 수립 하여 이 계획에 따라 올바른 길을 택하는 활동이다. 덕이란 이성적 기능을 탁월하게 발휘하는 활동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습관화되어지는 차원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 스는 ‘덕이란 중용에서 이루어지는 행위선택과 관련된 성품으로, 이 중용은 이성적 원리에 의하여 결정된다’고 진술한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중용인이란 인간의 본질적 기능인 이성적 사고능력을 지속적으로 탁월하게 발휘하여 인간으로 서의 존재를 완성하는 인간이며, 이러한 사람을 우리는 이성적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2) 행복한 인간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행복함이란 덕을 따르는 활동 즉 이성적 기능을 탁월 하게 발휘하는 활동의 과정이다. 인간의 이성적 활동이야말로 잘하는 행위이고, 잘하 는 행위를 지속적으로 이루어감은 잘 사는 일로서 잘 사는 일이 곧 행복함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은 쾌락과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때의 쾌락은 물 질적, 감각적, 향락적 쾌락과는 차원이 다른 정신적 쾌락이자 내면적 쾌락이다. 즉 행 복에 수반되는 쾌락은 인간의 본질적 기능인 이성적 사고능력을 탁월하게 발휘하는 데에서 오는 성취감, 만족감과 같은 순수한 내면적 차원의 것인 것이다.
3) 관조적 인간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자기목적성과 자족성을 갖춘 행복은 인간 삶의 궁극적 목적으로 충분하다. 행복을 삶의 궁극적 목적으로 삼아 이성의 활동에 충실한 사람 은 불완전하고 유일한 쾌락, 명예, 재산 등을 삶의 목적으로 삼아 타인들과 극심한 경쟁을 일삼을 필요가 없으며, 그릇된 삶의 목적에 싫증을 느끼어 새로운 삶의 목적 을 찾기 위한 분주함에 처할 필요도 없다. 이에 이성의 활동에 충실한 행복한 인간 은 소요하는 관조의 삶을 살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중용인은 이성적 인 간이자 행복한 인간 그리고 관조의 인간이다. 그리고 그는 이와 같은 중용인에 가장 가까운 현실적 인간으로 知者(philosopher)를 지칭한다.
Ⅳ. 子思의 中庸人觀과 아리스토텔레스의 中庸人觀의 대비적 비교
子思에 있어서 중용은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음이다. 그렇다고 하여 子思에 있어 서 중용이 넘침과 모자람의 산술적 중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 있어서 중 용은 최선의 적합성이 변함없이 지속됨을 의미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도 중용은 과도함과 부족함의 중간이다. 그렇다고 하여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중용이 과도함과 부족함의 산술적 중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 있어서 중용은 과도함과 부족함도 아닌 최적의 가치론적 절정을 이루 도록 결정되어진 상태를 말한다. 이와 같이 子思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중용 이란 결코 산술적 중간이 아니라 최선의 적절성을 갖춘 절정 상태라는 점에서 동일 하다.
이와 함께 子思에 있어서 중용을 지속적으로 실현하는 중용인은 인간의 본질로서 의 性 즉,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性을 발현함으로서 인간으로서의 존재완성을 이루어 가는 사람이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중용인은 인간의 본질로서의 이성 즉,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이성적 사고능력을 발휘함으로써 인간으로서의 존재완성을 이루어가는 사람이다. 이와 같이 중용이란 인간의 속성 즉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속 성을 발현함으로써 인간으로서의 존재완성을 이루어가는 사람이라는 점에서도 子思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의견은 일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본질적 속성을 발현하는 중용인의 구체적인 모습에 있어서는 두 사람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子思에게 있어서 중용인은 도덕적 인간 창조적 조화인, 성실한 인간, 봉사적 참여인으로 구체화된다. 이와 반면 아리스토텔 레스에게 있어서 중용인은 이성적 인간, 행복한 인간, 관조적 인간으로 구체화 된다. 중용과 중용인의 본질적 의미에 대한 子思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의견일치에도 불구하 고 중용적 인간상의 구체적인 전개모습에 대한 두 사람의 의견 불일치는 어디 에서 기인하는가? 이것은 중용인을 논의하는 두사람의 관심의 방향이 서로 다름에 기인한 다.
子思는 중용인을 논의함에 있어서 행함의 측면을 강조한다. 그는 실천적 측면을 크게 강조하며, 중용인이 발현하여야 하는 인간의 본질적 속성을 도덕적 심성인 性으 로 규정하여 이 도덕적 심성을 실천적으로 발현하는 도덕적 인간을 중용인의 구체적 인 모습으로 규정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인을 논의함에 있어서 앎의 측면을 강조한다. 중용적 一點 의 인식 측면에 비중을 두며, 중용인이 발휘하여야 하는 인간의 본질적 속성을 이성 으로 규정하여 이성적 인식 및 사유에 충실한 이성적 인간을 중용인의 구체적인 모습 으로 규정하였다.
이와 같은 중용인의 행 측면 강조와 중용인의 앎 측면의 강조라는 서로 다른 관심 의 지향 속에 도덕적 인간, 그리고 이성적 인간이라는 서로 다른 중용인상을 구체화 한 子思와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이후의 전개에 있어서도 서로 다른 중용인상을 전개 한다. 즉 子思에 있어서, 중용인이 선천적인 도덕적 심성을 성실하게 발현하여야 하 는 성실한 인간인 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인은 이성활동에 수반되는 내적인 성 취감 만족감 속에서 잘 살아가는 행복한 인간으로 구체화된다. 그리고 도덕적 심성의 행위적 발현은 구체적 사회현실 속에서 이루어질 수 밖에 없음으로 인하여 子思의 중용인이 타인과의 창조적 조화 속에서 타인의 도덕적 존재완성까지도 책임지는 봉 사적 참여인으로 구체화되는 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인은 실천적 행위에 앞서 이성적 사색을 즐기는 관조인으로 구체화된다.
이상의 논의에서와 같이 子思와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인이 인간의 본질적 속성을 발현함으로써 인간으로서의 존재완성을 이루어가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그들의 의견이 일치한다. 그러나 중용인의 구체적 모습을 전개함에 있어서 子思가 중용인의 行의 측 면에 비중을 두는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인의 知 측면에 비중을 둠으로 인하여 중용인의 구체적인 모습에 있어서는 두 사람의 의견이 일치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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