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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칼럼4. 도의 속성과 현대 물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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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논술샘 작성일07-10-17 13:44 조회1,94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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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의 속성과 현대 물리학..

 

 

도를 도라 부르는 것은 진정한 도가 아니다.

 

도덕경 맨 첫 구절에서 나오는 말이다.

우리가 어떤 사물을 기억하고 안다는 것은 내 머릿속 뇌의 작용이다.

따라서 기억이고 이미지일뿐 그 사물의 실체가 아니다.

내가 누구를 사랑한다고 하자.

내 머리 속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은 온통 좋은 것 뿐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 사람을 아주 싫어한다면 그 사람의 머릿속에는 온통 나쁜 기억만 가득할 것이다. 무엇이 그 사람의 실체인가?

아무도 모른다 오직 그 사람만이 그 사람의 실체일 뿐.......

둘의 머리속에 기억되어 있는 사람은 원래의 그 사람이 아니다.

노자의 도 또한 바로 그런 것 같이 원래 존재하는 그 자체 일 뿐 인간의 인식과는 상관이 없다.

반면 서양에서는 데카르트의 이원론처럼 나에게 인식되지 않는 사물은 존재 가치가 없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말은 곧 생각(인식)= 존재라는 2분법적인 관점을 취한다. 생각하지 못하는 것,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이다.

 

큰덕의 모습은 도와 같다. 도는 오직황홀하기만 하여 그 형상을 분간해 인식할 수 없다. 볼 수도 없고 잡을 수도 없는 그 속에 물(物)이 있다. 잡을 수도 볼 수도 없는 그 속에 형상이 있다. 도는 아득히 멀고 그윽이 어둡기만 한데 그 속에 정기가 있다. 그 정기는 지극이 진실이다. 그 속에 믿음이 있다.[도덕경21장]

혼합하여 이루어진 것이 있는데 천지보다 먼저 생겼다. 고요히 소리도 없고 형체도 없다. 나는 그 이름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져 부르는 이름이 도다 [도덕경25장]

 

보려해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 해도 보이지 않고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다. 그것이 뒤섞여서 하나가 된다. 이것을 꼴없는 꼴이라 하고, 실체 없는 형상이라 한다. 이것을 황홀이라 한다.[도덕경14장]

 

도는 일을 낳고 일은 이를 낳고 이는 삼을 낳는다. 만물은 음기를 겉에 가지고 양기를 안에 간직하며 충기로 조화를 이룬다.[도덕경42장]

 

천하 만물은 유에서 나오고 유는 무에서 나온다.[도덕경40장]

 

도는 있는 듯 없는 듯하다 나는 그것이 누구의 자식이지 모른다. 하나님보다 먼저인 듯하다[도덕경4장]

위의 도덕경에서 나오는 도의 형상 및 실체를 읽노라면 노자는 환상속에서나 꿈에서 분명 뭔가를 보기는 보았는 듯하다.

 

현대 우주 만물의 생성원리를 보고 그 것을 표현했다는 말이 맞지 않을까..

물질의 근원을 밝히는 작업은 현대 물리학의 과제였다.

서구의 기계론적 세계관은 물질을 계속 쪼개 나다가 보면 맨 마지막의 물질이 모든 물질의 근본일 것이라 생각했다. 부분의 합이 곧 전체가 된다는 이러한 생각은 현대의 첨단 과학기술의 영향으로 곧 미시세계의 비밀을 파헤칠 것으로 예견되었다.

하지만 곧 인간과 과학이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부딪히고 말았다.

 

아이슈타인에 대적하는 현대의 대표적 물리학자인 보어는 빛(전자)의 성질을 입자와 파동의 성질이 함께 있는 상보적 개념으로 설명하면서 전통적인 물리학으로서는 설명할 수 없고 관찰 할 수도 없슴을 선언하였다.

빛은 입자적 특성과 파동의 특성 모두를 가지고 있는데, 빛의 이러한 양면성은 20세기 초의 물리학자들을 괴롭혔다고 들었다. 빛을 입자로 보아 세운 이론은 빛의 파동으로서의 특성을 설명할 수 없고 반대로 파동에 입각한 학설은 빛의 입자적 성질을 설명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난제를 간단히 해결한 이가 덴마크의 양자 물리학자 닐스 보어이다. 그는 어느 날 저녁, 빛의 딜레마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며 강가를 거닐고 있었는데 마침 그때에 지평선 너머에는 저녁놀이 아름답게 물들고 있었다고 한다. 문뜩 닐스 보어의 머리 속으로 섬광 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고, 그 생각은 바로 “시인이 저녁놀이 아름답다고 읊는 것은 빛의 광학적 진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곧 이어 그는 “시인도 만족하고 광학자도 만족하는 학설이 있을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고, 한 시인이 저녁놀을 보며 `술 익는 마을마다 지는 저녁놀`이라 노래할 때 시인은 저녁놀이 붉은 것은 파동이 길어져 붉은 빛만 우리 눈에 비치기 때문이라는 광학적 진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며, 마찬가지로 물리학자가 햇빛은 파동에 따라 빛깔을 달리하는 빛 다발의 묶음이라는 진리를 주장할 때 시인이 노래한 노을의 아름다움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곧 그는 시인의 진리와 과학의 진리를 동시에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은 있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고 시의 세계와 과학은 서로 독립적으로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그렇다고 서로 상대방이 틀렸다고 주장하지도 않는 것처럼, 빛의 입자적 특성을 설명하는 이론이 파동적 특성을 설명할 수 없다해도 조금도 문제될 것이 없고 반대로 빛을 파동으로 설명하는 이론이 입자적 특성을 설명하지 못해도 상관이 없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두 이론은 각기 독립적으로 빛의 성질을 잘 설명하는 훌륭한 이론들이며, 빛의 두 성질을 동시에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은 있지도 않고 또 있을 필요도 없는데 이것은 두 이론이 서로 상보적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낸 이 원리가 바로 닐스 보어의 `상보성 원리`인 것이다.

 

한편 하이젠베르크는 파동과 입자에 대한 그의 입장을 정리한다. 이른바 불확정성의 원리이다. 파동과 입자 어느 한쪽을 측정하려 하면 반드시 다른 하나를 변화시키게 된다는 것이다.

왜? 우리는 전자의 상태를 알기 위해서는 관찰이 필요하고 그 관찰을 위해서는 빛과 장소.위치등의 조정된 조건이 필요한데 그러한 우리의 관찰 행위(빛을 비추어 물질을 관찰해야 하는 것)자체가 전자의 속성을 바꾸어 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이젠 베르크는 전자의 모양이나 속성 등 전자의 어떤 것도 알려는 일체의 더 이상 노력은 쓸모없고 무의미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를 어느 학자는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정리했다.

 

또 이 무슨 말인가?

하이젠 베르크는 답한다. 그는 “원자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가”의 질문에 “생각하려 애쓰지 말아야 한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과학교과서에 나오는 전자의 모양 그림은 뭐지?

그건 그냥 허무 맹랑한 상상력의 결과이다.

전자의 모양을 그린다면 그건 보이지 않는 노자의 도를 그림으로 그리는 것과 같은 것일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현대 과학의 항복 선언과도 같은 것이다. 객체(실험대상)와 주체(실험자)를 분리하고 그 객체를 관찰과 실험을 통해서 알 수 있을 것이라던 현대 과학의 신념이 어이없이 무너져 버린 것이다. 이제 더 이상 현대과학으로 알아낼 것이 없으며 우리 인간이 대상 세계를 정확이 이해 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노자의 도에 대한 설명을 다시 보자.

도는 있는 듯 없는 듯하다 나는 그것이 누구의 자식이지 모른다

보려해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 해도 보이지 않고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다. 그것이 뒤섞여서 하나가 된다. 이것을 꼴없는 꼴이라 하고, 실체 없는 형상이라 한다. 이것을 황홀이라 한다.

도는 오직황홀하기만 하여 그 형상을 분간해 인식할 수 없다. 볼 수도 없고 잡을 수도 없는 그 속에 물(物)이 있다. 잡을 수도 볼 수도 없는 그 속에 형상이 있다.

노자가 도를 설명하는 부분은 현대 물리학이 원자를 설명하려는 부분과 너무나 닮아 있다.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것.

분명이 있기는 한데 무엇인지는 설명할 수 없는 것 그것이 현대 과학이 말하는 물질의 근본이 원자이고 노자가 말하는 도인 것이다.

노자는 혹시 2500년 전에 하이젠 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를 설명하려 한 것은 아닐까?

이제 보어의 말처럼 과학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시와 철학적 해석을 동원해야 할 때인것이다.

도를 도라 말하는 것은 진정한 도가 아니다. 이 말로 원자를 설명해 보자.

원자를 어떤 것이라 말하는 것은 진정한 원자가 아니다.,

댓글목록

고3님의 댓글

고3 작성일

재미있네요 ㅋㅋㅋ
노자에 대해 공부하고 싶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