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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스 윤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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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논술샘 작성일11-12-21 13:23 조회21,18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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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년간 논술 시험에서 고대 그리스 철학과 관련하여 가장 많이 인용된 책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스 윤리학이다.

강의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고대 그리스 철학은 동양사상과 유사한 점이 많고

또한 도덕과 윤리, 삶의 근원적인 목적에서도  궁극적으로는 거의 대부분의 유사성을 드러낸다. 이러한 유사성으로 인해 동양의 사상, 특히 가장 많이 인용된 장자나 노자의사상과 대비하면서 읽기를 권하고 싶다.

 

1권 인간을 위한 선

인간은 왜 사는가? 바꾸어 말하면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답은 간단하다. 인간은 행복해지기 위해서 산다. 요컨대 인간의 삶의 최종적인 목적이자 선(좋음/ to agathon)은 다름 아닌 행복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행복(eudaimon)은 인간의 힘과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선이기도 하다.


2권 윤리적인 덕


아리스토텔레스는 선(좋음/ to agathon)으로서의 행복을 '완전한 덕에 따르는 마음의 활동'이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덕을 지적인 덕과 윤리적인(도덕적인) 덕으로 구분한다. 윤리적인(도덕적인) 덕은 습관의 결과로 생기며, 지적인 덕은 교육에 의해 발생하거나 성장한다.


윤리적인 덕목들의 성격- 순수한 마음의 활동과 능력 그리고 이성적인(logos) 앎에 관여하는 진정한 철학적 지혜(sophia)와 추론적사고 (논리적 사고나 이해)에 속하는 혼의 고유한 능력이나 상태와는 구분되는 인간사회내의 겪음이나 그 행동에 대한 훌륭함(덕/탁월함/arete)에 대한 이해라 볼 수 있다.

즉 감각이나 지각을 통해 생겨나는 겪음(정감/pathos)이나 행동(praxis)에 대한 신체와 관련된 욕구 혹은 기개(격정) 에 관련된 여러 특수한 상황과 조건 그리고 이에 따른 공동체안에서의 바람직한 행위(몸가짐)와 이러한 행동을 취하는 마음가짐과 선택에 관여하는 인간의 행위의 덕목들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윤리적인 덕목에는 절제라든가 용기가 있다. 이러한 덕목들은 자신뿐만아니라 타인에게 유익하고 건강하고 좋은것에 관계하는 행위의 덕목들이다.
행위자 자신이 타인들과 관계 맺음으로 인해서 부닥치는 여러가지 상황과 욕망이 생겨날 수 있는데. 이것들과 관련해서 행위자 자신뿐만아니라 타인에게도 좋은 이득을 안겨줄 수 있는 적절한 행위의 덕목들(탁월함)을 상식적인 차원에서 접근해간다는 점이다. 이러한 덕목은 물론 지나침이나 모자람이라는 극단의 중간에 위치하는 적절한 행동의 능력이나 결과로서의 중용의 덕이다.

자연적 성향이나 신체와 관련된 욕구나 지각에 의해 생겨나는 정감과 공동체에서 겪는 여러 상황들에서 중용을 선택하려는 행위자 자신의 정신적 능력이 주된 행위의 동기와 원인이 됨을 보여주려고 한다는 것도 놓쳐서는 안될 것이다.

결국 중용의 덕은 올바르고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적절한 행위의 결정을 위한 심사숙고 나아가 선택과 관련이 됨을 보여주려고 한다. 따라서 인간에 있어서 모든 행위의 덕목들에 있어서 중용의 덕을 실천할 수 있으려면 행위에 앞서서 심사숙고하고 주어진 상황과 혹은 예기치 않은 여러 상황을 미리 헤아리면서 판단하는 행위의 목적과 의도에 더 큰 비중이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여기에서는 각각의 개별적인 상황에 대한 행위자 자신이 바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혹은 욕망(고통은 피하려하고, 쾌락은 추구하려 하는 인간의 성향)에 대한 이해와 각각의 상황의 특수성을 인지하는 개별적이고 실천적인 지혜가 동반됨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제각각 다른 여러 상황에서 타인들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인간들에 있어 오랜 시간과 경험을 통해 관습화된 몸과 마음의 상태라 여겨지는 윤리적인 덕목들을 고찰해봄으로써 그리고 타인들과 어울려 공동의 목적과 선을 추구해가는 정치술에는 이러한 윤리적 덕목들에 관계하는 실천적인 지혜가 필요함을 역설한다고 볼 수 있다.
나중에 논의하겠지만 정의를 위한 배분의 여러가지 성격을
즉 국가(공동체)의 공물을 분배하는데 우선 공동체가 생겨나는 교환과 무역에 있어 계량적인 가격으로 균형을 찾는 (실제로 수요자와 공급자의 두항과 수요물과 공급물의 2항이 있어 4가지 항이 생긴다)무차별적으로 적용되는 그 중간의 보편적인 정의(수요자와 수요물의 거리 와 공급자와 공급물의 거리에서 그 중간을 취하는 산술적 정의(산술조항) , 혹은 그사람과 물건이 단일한 항이 아니기에 이같은 연속적인 비례관계에 있는 것에 그 비례적인 중항을 그 중간으로 하여 배분하는 것 (기하학적인 비례중항- 조화중항) 그리고 사회집단내의 당사자의 거래나 계약을 넘어서 사회적으로 발생하는 여러가지 사건(절도나 폭력)에 있어 피해자와 가해자의 이득과 손실(피해나 고통)이 발생하는 상호모순적인 즉 이득과 손실의 중간을 따르는 시정적 정의(차등을 통한 분배의 균형을 추구)가 있는데.. 이러한 다툼의 중재자로서 그 중간에 처하여 그 둘의 손실과 이득을 균등한 두 부분으로 나누어(dike) 공정하고 평등한 것으로 판정하는 재판관(dikastes)의 정의가 있는데, 여기에는 더가진 것에서 중간이상에서 넘치는 것을 떼어 덜가진쪽에 중간에 못미치는 만큼 보태줌으로써 상호간에 균등하고 공정한 중간의 몫을 나누는 비례적인 나눔과 배분의 성격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이 밖에도 사람들 사이에 만연한 특수한 정의론 즉 자력구제나 피해를 피해로 되갚으려는 악의적인 보상적정의관을 호의와 자연법이나 사회적인 제도와 법적인 정의를 통해 개선하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사실 올바르고 평등하고 균형있게 이 정의의 덕의 의미를 규정하기는 쉽지 않은 듯 쉽다. 그렇다하더라도 근본적으로 이 정의의 덕은 타인을 위한 선(좋은 것) 이 기준이 되야한다는 생각,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이고 혹은 개인의 윤리적 행위는 행위자 자신의 의도와 심사숙고 나아가 덕이 있는 심성(덕성)의 자발적인(행위자 자신안에 그 행위의 그 원인이 있기에 책임또한 있게된다)면과 공동의 좋음(선)을 목적으로 하여 구체적으로 그 상황의 특수하고 개별적인 조건을 헤아리는 숙고와 선택 과 결정)이 그 사람의 행위의 결과못지 않게 더욱 중시된다는 점이다.

*****
몸가짐이나 마음가짐이 오랜 겪음을 거쳐서 쌓여 굳어진 상태(관습, 습관/hexis) - 성격(성품/character)이 된다.--- ethos ---ethics

그러나 수학적이고 물리적인 필연적인 사실에 대한 법칙과 존재의 근본적인 원리 그리고 원인에 대한 사유의 활동인 순수한 지적인 활동과는 구분된다고 볼 수 있다.

정치학이란 국민을 어떤 일정한 성격이나 성품을 가진 인간이 되도록 즉, 선한(훌륭한) 사람을 그리고 또한 고귀한 행위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하는데 심혈을 기울이는 것이다.


덕에는 두가지 종류가 있다.

지적인 덕과 윤리적인 덕이 있다.
지적인 덕은 대체로 교육(가르침)에 의해 생겨나기도 하고 자라나기도 한다.
도덕적인 덕은 관습의 결과로 생긴다. 윤리적인 덕은 본성적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또한 본성에 반하여 우리 속에 생기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본성적으로 그것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규칙적이고 지속적인 훈련이나 관습(행동에 관여하는 마음과 몸의 상태가 여러가지 상황과 경우를 거치면서 습관을 통해 굳어진 상태)에 의해 완성되는 것이다.

덕은 겪음(정감/pathos) 과 행동에 관련된 것이다.
의도를 갖고(고의로) 하는 행위와 의도를 갖고 있지않은 (무심결에) 행위를 구분하는 것은 덕을 연구하는 이들에게는 꼭 필요한 것이고, 입법가가 상벌을 다루는 일에 있어서도 유용한 것이다.


유의적인 (일부러) 행동과 의도하지 않은 행동은 행위가 일어나는 그 순간과 연관되는 것이다. 의도를 지닌 행동은 그러한 행위에 있어 그 사람의 신체의 기관들을 움직이는 시초가 그 사람 속에 있고, 또한 그 사람 자신 속에 움직이게 하는 시초를 가지고 있어서 할 수도 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의도가 없는 행위는 무지나 강요에 의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강요된 행위는 원인이 외부의 상황에 있고 행위자는 그 원인에 조금도 관여할 수 없는 행동을 무조건적으로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때로는 행위들 자체는 의도하지 않은 것이지만 그 행위자체가 선택할만한 가치가 있거나 그 행위들로 인해 얻어지는 소득이 있을 경우는 유의적인 것으로 보여진다.
강요즉 마지못해하는 경우는 고통을 느끼면서 행하지만, 하고자 해서 하는 사람들은 유쾌와 고귀함을 느끼며 행하는 것이다.
책임을 외부의 상황으로 돌리고 자신에게 책임이 없다는 매력에 사로잡히기 쉽고, 이와 반대로 고귀한 행동의 원인은 자기자신에 돌리고 추악한 행동의 원인은 유쾌한 대상으로 돌리는 것은 온당치 않은 것이다.

무지에 의해 행하는 행동은 고의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심결에 하는 행동이라고 할려면 고통과 후회가 뒤따라야한다.
사실 무지(어리석음)때문에 하는 행동은 모르고 하는 행동(술에 취했거나 홧김에) 과는 다르다. 즉 과오에 의해서 행했다면 무심코 했다고 볼 수 없다.

선택에 있어서 무지는 의도없이 하는 행위의 원인이 아니요 오히려 나쁨의 원인이며, 의도없는 행동은 일반적인 무지가 아니라 개별적인 여러 상황에 대한 무지, 즉 주위의 사정이나 행위의 대상에 대한 무지이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에는 동정과 연민이 생기는 것이다.
미친 사람이 아니고서는 모든 것에 모든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행위자가 누구인지 즉 자기자신을 모른다고 하는 것 또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행위의 상황과 그 목적이라 할 수 있는데,
강제나 무지에 의해 하게 되는 것은 의도하지 않은 것이므로 고통과 후회를 가져온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욕망을 따른 행위는 유쾌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면 심사숙고끝에 저지른 과오와 노여움 속에 저지른 과오는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과오는 이것들 중 어느 것에도 피해야만 할 것이되, 이성적이지 못한 정감이라도 이성못지않게 인간적이고 따라서 노여움이나 이러한 감정의 겪음에서 나오는 행위가 의도를 지니고 있지 않은 무심결에 한 행동이라 할 수 없다.

2장

선택

선택은 의도한 행위라 보여지지만 실상 의도를 지닌 것(ekon)과 똑같은 것은 아니다.
유의적인 것이 더 범위가 넓다. 왜냐하면 아이들과 인간보다 더 하위의 동물에도 유의적인 행동이 있지만 선택은 없는 듯 쉽다. 또 순간적으로 생각이 나서 하게 된 행위를 유의적이라 하지만 선택된 것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선택에는 욕정(욕구), 격정(기개), 바람(희망)이 있다.
혹은 의견(생각)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옳은 것 같지 않다.
왜냐하면 선택은 비이성적인 여러 동물에는 공통되는 것이 아닌 데 반하여 욕정이나 격정은 공통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욕정에서 행하지만 선택하고서 행동하지는 않는다.
욕정은 유쾌한 것과 고통스러운 것에 관계하는 것이지만 선택은 이 두가지 것의 어느 것에도 관계하지 않는다.

선택과 심사숙고(prohairesis)-미리 헤아려 결정하는 것
바램, 소망(boulesis)
의견 , 생각(doxa)
욕구 , 욕정 (epithymia)-혹은 신체의 영양 물질대사
기개, 격정(tymos)
의도를 지니고 (일부러)-ekon
의도없이(무지나 강요로)-akon

기개, 격정(tymos)은 욕구(욕망)보다 더욱 선택과 거리가 멀다.

선택은 바램(소망)도 아니다. 이 둘은 아주 비슷해보이지만 같은 것이 아니다.

선택은 불가능한 일에 관계할 수 없고, 만일 어떤 사람이 불가능한 일을 선택했다고 하면 어리석은 사람으로 생각되겠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가능한 일에 대해서는 바람(희망)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즉 자기자신으로서 이루를 수 없는 일은 선택하는 일이 아니다.
다만 자기자신의 힘으로 이룰 수 있으리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만을 선택하는 것이다.
바램은 대개 목적에 관계하고 선택은 대개 수단에 관계한다.
예를들어 우리는 건강하게 되기를 바라지만 우리를 건강하게 하는 여러가지 행위는 선택하는 것이다.
또 우리는 행복하게 되기를 원하고 바라면서.. 그렇게 말하지만 행복하게 되기를 선택한다고 말하는 것은 좀 어색해 보인다. 물론 스스로 자신을 불행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선택은 의견일수도 없다.

의견은 온갖종류의 사물에 관계하는 것으로서 우리 자신의 힘이 미칠 수 있는 일들에 못지 않게 영원한 것들과 불가능한 것들과 가능한 일들에도 관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의견은 참과 거짓인가에 따라 구별되고 좋은가 나쁜가에 따라 구별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선택은 오히려 좋고(agathos) 나쁨(kakos)에 따라 구별된다.


우리는 어떤 좋은 것이나 나쁜 것을 얻거나 피하려 할때 선택하지만, 어떤 물건이 무엇인지 혹은 그것에 무엇에 좋은지 또 혹은 이것이 어떤 사람에게 어떻게 좋은지는 의견을 품기때문이다.

의견이 선택에 선행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선택에 수반하느냐 하는 것은 여기서 문제삼을 것이 못된다.


선택은 유의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유의적인 것이 모두 선택의 대상인 것은 아니다.
선택이란 미리 숙고함으로써 결정하는 것이다. 어떻든 선택은 이성적인 원리와 사유를 포함하는 것이다.

숙고의 대상은 영원한 것이나 우연적인 사건에 관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숙고하는 것은 우리의 힘이 미칠 수 있는 것이요, 또 이루어 질 수 있는 것들이다.

자연이나 필연이나 우연이 원인이 된 경우도 있지만, 이성이나 인간에 의거해 일어나는 것들이 있다. 엄밀하고 자족적인 학문내지 과학의 경우에는 숙고는 있을 여지가 없다.
반면에 기술에 관련해서는 더 많이 숙고하게 된다. 왜냐하면 더 많은 의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숙고는 대체로 일정한 방식으로 일어나지만 막상 어떠한 결과가 나올지는 분명치 않은 것들 즉 비결정적인 소이를 내포하고 있는 것들에 관해서이다.
우리가 숙고하는 것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가능한 것은 자신의 노력으로 이룰 수 있는 것 나아가 우리의 친구들의 능력으로 이루어 질 수 있는 것도 포함된다. 그 처음의 동인이 우리 자신 속에 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개별적인 사실들도 숙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이것이 철자인가 혹은 이것이 빵인가 하는 것들 말이다.
따라서 숙고하는 것과 선택되는 것은 동일한 것이다.
선택의 대상이 되는 것은 숙고의 결과로 결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또 참된 의미에서 좋음이 바램(희망)의 대상이지만 각 사람에게는 좋은 것으로 보이는 것이 바램의 대상이고, 즉 선한 사람에게는 참된 의미의 바램의 대상이 그의 바램의 대상이 되고, 나쁜사람에게는 우연한 것이 그의 바램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컨대 선한사람은 모든 것을 올바르게 판명하고 또 모든 경우에 그에게는 그에게는 참된 것이 눈에 뜨이기 때문이다. 결국 성품에 따라 무엇이 고귀한 것이고 무엇이 유쾌한 것인가에 대해 보는 바가 다른데, 선한 사람은 모든 일에 있어 진리를 보는 점에서 다른 사람과 다른 것이다. 대개의 경우 과오는 쾌락때문에 생기는 것 같다. 쾌락은 선이 아닐때에도 선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대개의 사람은 쾌락을 주는 것을 선으로 선택하고 고통을 악으로 피하게 되는 듯 쉽다.

목적은 우리가 바라는 것이요, 수단은 우리의 숙고하고 선택하는 것이므로 , 수단에 관계되는 행위는 선택에 의거하는 것이다. 그러니 유의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덕의 활동 역시 수단에 관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덕은 우리자신의 힘의 범위 안에 있는 것이고, 악덕도 그러하다.

고귀한 행위나 비천한 행위를 하고 안하는 것이 바로 덕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것과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이 또한 우리 자신의 힘(능력)에 속해 있다고 하겠다.

나쁜(사악한) 사람이 되는 것도 결국 자신 안에 있게 되는 것이다.
어떤 특정한 성질의 활동으로부터 여기에 대응하는 성품이 형성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의 표식이다. 또 불의를 행하면서 불의한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라거나 방탕한 (자제하지 못하는/akratos) 행위를 하면서 방탕하지 않은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불합리한 것이다.


정신의 여러가지 악덕만이 유의적인 것이 아니요, 또한 신체의 그것들도 어떤 사람에게는 유의적인 것이다.
나면서부터 혹은 병이나 부상으로 장애를 가지게 됨으로써 방탕해진 사람을 우리는 욕하지 않고 오히려 연민을 갖게 되지만 폭음이나 기타 자신의 힘의 범위안에서 자제하지못하고 방탕해지는 사람은 비난받게 될것이다. 신체의 악덕 또한 비난받는 것은 유의적인 것이고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범위안에서다.

목적이 각 사람에게 제각각 나타나 보이는 것은 본성에 의한 것이 아니고 어느 정도는 그 사람의 노력에 달렸건, 혹은 목적은 본성적인 것이로되 다만 선한 사람이 수단을 유의적으로 채택한다는 이유만으로써 덕이 유의적인 것이건, 어떻든 덕이 유의적인 것이라면 그에 못지 않게 악덕도 유의적인 것이다.
결국 덕이 유의적인 것이라면 우리는 우리의 성품에 대해서 어느 정도까지는 책임을 져야한다.우리가 목적을 설정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종류의 사람인가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덕은 중용이요 또 성품(성격의 상태)이며, 덕은 그 본성상 그것을 낳는 행위를 하게 하는 행방을 가지고 있으며, 올바른 이치가 명하는 것을 따른다는 할 수 있다.
그러나 행위와 성품은 똑 같은 모양으로 유의적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특수한 사실을 낱낱이 알고 있을 때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가 우리의 행위의 주인이 되는 것이지만 우리의 성품에 대해서는 우리가 그 시초를 좌우할 수 있을 지라도 그 점차적인 진행은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진전은 마치 병세의 진전만큼이나 명백하지 않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 행동하고 또한 행하지 않는 것은 우리의 힘의 범위안에 있었던 까닭으로 인해 사실상 성품또한 유의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윤리적인 덕(ethos)과 기예(techne)


중용의 덕은 각각의 행위에 있어 그 행동의 지나치거나 모자라는 것의 중간의 것을 선택하려는 숙고 사려있는 선택- 자발적인 혹은 뜻을 갖고(의도적인)즉 미리 심사숙하는 마음이 필요하고 그 적정한 행동방식을 취할 줄 아는 지식도 요구된다.

만듦(창조/poiesis) 즉 기예(techne)나 제작은 활동 즉 실천이나 행동(praxis)과는 다른 것이다.

사실 모든 종류의 기술은 생성의 영역에서도 다른식으로 있을 수 있는 것들에 관계한다. 즉 그것은 존재할 수도 존재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든 간에 그 단초가 제작자에게 있다. 왜냐하면 제작자가 이리저리 궁리하면서 자신이 생각해낸 기능을 부여하여 그 사물(제작물)이 구체적으로 그러한 목적(기능)에 부합하도록 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심사숙고의 대상이 되는 것이고 인간의 힘이 미치는 한에서 여러가지 형태의 창조물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제작은 수단에 관계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적으로 생겨난 것들 온갖 종류의 생명체들은 인간의 심사숙고에 의해 미칠 수 있는 힘과는 무관해보인다. 그러한 것들의 활동은 본디 타고난 성향에 따라 활동하는 것이다. 또한 기후의 변화나 천체의 운동과 같은 것도 인간의 힘이 미치는 영역이 아닌 필연적인 영역의 것이다. 또한 인간들에 있어 태어나고 죽는 것 혹은 어린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하는 것은 기술과 상관없이 존재하는 것이고 생성되고 변화하는 것이다.


용기


실천의 덕으로 <중용>을 내세우는데 중용은 산술적인 중간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산출하는 일률적인 계산법이 있을 수 없고 이성적 직관에 호소하는 것이다. 실천의 덕에서는 또한 중용의 표현이라는 결과뿐만 아니라 동기의 측면에서 고의적이 아닌 행위 즉 강제당한 행위와 모르고 한 행위가 있는데 강제당한 행위에는 책임을 물을 수 없고, 무지에 의한 것은 응당 알아야 할 바를 모른 것이므로 책임을 져야 한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실천의 덕으로서의 중용 mesotes이란 지성 nous적인 원칙에 의해서 결정된다. arete란 하나의 상태인데 비이성적이고 동물적인 욕망에 대비되는 것으로서 지성적인 존재에 의해서 선택되는 것이다. 중용은 두 극단적인 것의 중간에 있다.

'명예와 불명예에 관해 말하면, 그 중용은 긍지요, 그 과도는 이른바 오만(허영)이요, 그 부족은 비굴이다. 노여움에 관해 말하면, 그 중용은 온화요, 그 과도는 성급함(성마름)이며, 그 부족은 성질 없음이다. 진리의 중용은 진실이요, 그 과도는 허풍이며, 그 부족은 거짓 겸손이다. 돈을 주고받는 일에서 중용은 너그러움(관후함)이며, 그 부족은 인색함이고 그 과도는 방탕(낭비)이다.'


<용기>는 비겁과 무모함의 중용이요,
<절제>는 금욕과 방종의 중용,
<관후함>은 인색과 낭비의 중용,
<긍지>는 비굴과 오만의 중용이다.
<온화>는 성마름과 성질없음의 중용이요
<진실함>은 허풍과 거짓겸손의 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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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제


이 다음으로 절제에 대해서 말해보자. 사실 이러한 덕목들은 이성적이 않은 부분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물론 우리는 절제가 괘락과 관련하여 그 중간 (중용)이라고 하지만 고통과 관련된 일들과는 거의 유사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과 관련해서 무절제도 보여진다. 따라서 쾌락들 속에서 어떠한 종류의 것들과 관련되어있는지 이제 구별해보자. 혼의 관련된 것과 신체에 관련 것이 있다.
먼저 절제가 혼에 관련된 것들로서 이를테면 명예를 좋아하고 배움을 좋아하는 것이 이야기 될 수 있는데, 이것들 각각이 즐거운 것이고. 그것에 대한 애정인데, 이러한 것들은 신체로부터 겪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고에 의해서 겪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쾌락들이 관계(목표)하는 것들은 절제의 덕목들이나 무절제의 덕목들이 아니라고 말해진다. 그리고 이것들 밖에도 다른 많은 것들 또한 신체와 관련된 것들이 아니다. 이를테면 이야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나 해설꾼들 그리고 일어난 일과 관련해 온 종일 수다떠는 일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을 무절제한 자들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돈이나 애정에 관한 일로 고통스러워하는 자들 또한 그렇다.
다음으로 절제가 신체와 관련된 일들에 관계하는 것으로 보여질 수 있는데, 그러나 이 같은 것이 전적으로 신체와 관련된 것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시각)으로 인해 어떠한 것들 즐기는 자들은 이를 테면 색깔, 모양, 그림(스케치)에 대해서 절제있는 자들이거나 혹은 무절제한 이들이라고 말해지지 않는다.
게다가 당연히 이러한 것들을 즐기는 것이라고 그리고 지나치다거나 모자란다는 차이만이 있을 것으로 생각 될 것이다. 물론 청각과 관계된 것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지나치게 즐기는 자들은 관심있는 자이거나 소리를 구분할 수 있는 판정자들로 말해지지, 마땅히(의당) 절제있는 자들이 이려니 혹은 무절제한자 들이라 말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후각과 관계되는 것들에서 (음식에)부수적으로 동반되는 것을 맡게되는 것을 빼고는 또한 그러하다. 사실 장미 혹은 자극적인 냄새 즐기는 자들이 무절제 자들이 아니라 후각이 예민한 사람들이라 말한다. 이러한 것들을 즐기는 무절제한 자들 또한 그러한 것들(후각,청각)을 통해 욕구하는 것들에서 기억해 내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건 다른 이들 간에 그들마다 고유한 것이고, 다만 굶주릴 때면 그 음식의 냄새를 즐기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에게 이러한 신체의 감각과 지각에 무절제하게 빠진다면 , 그에게는 그것이야말로 욕구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동일한 감각의 다른 생물들에게는 ,부수적으로 생기는 것을 제외하고는, 쾌락이 아니다 ,. 왜냐하면 개들은 토끼를 후각을 통해 즐기는 것이 아니라 음식으로서 즐기는 것이다. 후각이 그러한 지각을 만들어내는 것이지만, 사자는 소의 소리로서가 아니라 먹이로서 지각한다. 가까워지면 소리로서 알아챈다. 결국 먹이로서 즐기는 것으로 보여진다. 마찬가지로 사슴이나 야생염소를 아는 것이 아니라 먹이로서 아는 것이다. 절제는 이러한 것들과 관계된 쾌락이다. 그리고 무절제도 이러한 것에 속하고 나머지 생물들에도 공통된 것이다.
노예들과 짐승에게서도 보여진다.. 이들은 접촉되는 것이고 기호이다.
그러나 그러한 기호는 사소한것들이나 혹은 어떤 것에는 쓸모가 없어 보이지는 않는다. 와인맛(향기) 의 판단은 기호에 달려있다. 포도주에 만족해 하는 사람들은 후각을 증인들로 삼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적으로 음식으로 그것으로 즐기는 것은 아니라 후각으로써 즐기는 것이다 . 적어도 이들이 무절제한 자들이 아니고, . 그것은 음식물에 있어서 주색에 있어서 전적으로 신체와의 어느 한 부분의 접촉을 통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목이 빠진 두루미 보다 심하게 (지나치게) 그 자신에게 갈증이 있는 어느 미식가는 접촉으로 인해 쾌락을 얻는다고 과장한다. 무절제는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 감각들에 공통되는 것이기에 무절제는 비난받기에 합당한 것이라고 여겨질 수 있다. 사람들이 처한 상태가 아니라 동물로 처한 상태인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것들과 관련해 즐기고 가장 만족하는 것은 짐승들이다. 왜냐하면 자유인들은 접촉을 통해 쾌락을 얻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운동경기에서는 지속적인 연마와 열기로 인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무절제가 접촉하는 것은 육체 전체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그 육체의 어느 부분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재물과 관련된 덕목


명예에 관련된 덕목


노여움에 관련된 덕목


사교상의 덕목


덕 비슷하나 덕은 되지 못하는 것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덕은 결국 중용을 그 핵심으로 한다.
그러나 모든 행위와 모든 정념에 중용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예를 들어, 악의, 질투, 절도, 살인 같은 경우에는 그 중용이란 도무지 없으며,
그 자체가 나쁜 것이다. 요컨대 언제나 그릇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덕과 중용에 대한 위와 같은 일반적인 언급을 개별적인 사실에 적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의 행위란 어디까지나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경우에 관계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중용을 어떻게 성취할 수 있는가? 뜻하지 않은 우연이나 일시적 충동에 의해 중용에 맞게 행동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의 성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몸에 젖은 행동의 습관이라고 이야기한다. 일시적, 우연적으로 중용에 맞게 행동했다고 해도, 그것은 결코 항구적일 수 없다. 시종일관 중용에 맞는 행동, 즉 유덕한 행동을 거듭함으로써 우리는 덕의 습관, 중용의 습관을 얻을 수 있다.

결국 인격이란 오랜 세월에 걸친 일관된 도덕적 훈련과 그로 인한 습관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인격자란 모든 행동에서 자신이 형성한 중용의 습관에 맞추어 신뢰성 있게 행동하는 사람이다. 어떤 사람의 하나의 행위가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그가 전 생활의 모든 행동에서 중용을 지키지 않는 한, 그 사람을 유덕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이것을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한 마리의 제비가 왔다고 봄이 되는 것이 아니며, 하루의 실천만으로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정의

지적인 덕목들

철학적 지혜와 실천적 지혜


6권

마음(혼)

지적인 덕목들(신체의 부분이 아닌 이성적인 부분에 관여하는)

추론적 사고(논리적인 추론과 논증 수와 비례를 통한 사고의 활동)

철학적 사유

직관적 이성(원리에 대한 사유)

지혜(sophia)- 포괄적인 혼의 고유한 사유의 활동- 관상적 활동(theoria)

7권

억제 , 자제하지 못함(신체와 관련된 요구), 쾌락


(타인에게 이득을 주는 선이 진정한 기쁨과 쾌락)-타인에 입장에 선 쾌락


8권

우애 혹은 고귀하고 소중한 사랑(자애와 타인을 위한 배려와 균형있는 사랑)
자애 호의 협화

고귀하고 귀중한 마음


-참된 자애의 모습

사랑을 주는 것이 사랑을 받는 것보다 우애의 본징에 더욱 어울린다.

우애의 상호성과 공둥체의 상호성

우애(친구)는 운수가 좋은 때가 아닌 불운한 때 더욱 필요하고 값지다.

우애는 함께 하는 데 있다.


10장 쾌락과 행복


쾌락은 인간의 본성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그러기에 덕성의 훈련과 교육은 기쁨과 고통을 적절히 사용해야 하며, 지식이나 생활에 적용시켜 효율적인 교육효과를 가져오게 해야 한다.


쾌락이 선(좋음)이라는 주장 -에우독소스
모든 만물이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은 쾌락에 근거하는 좋음이다.

쾌락이 좋음(선)이 아니다는 주장

선은 자족적이며 그 자체로 존재의 근거가 되므로 그 속에 지혜가 곁들인 생활이
즐거운 생활이다.


그러나 세상사람들은 다분히 고통을 악으로 쾌락을 선으로 택하는 생활 속에 젖어있다.


쾌락이 일종의 어떠한 성질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해서 반드시 이것이 어떠한 종류의 좋음(선)이 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덕이나 행복도 어떠한 성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쾌락은 건강처럼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균제가 있는 것이 아니요, 이러한 균제가 한 사람에게 늘 같은 식으로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 균제가 유지되는 기간이나 상태에 있어서도 수 많은 정도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쾌락과 고통은 변화되는 것이며 생겨나는 것이다
쾌락이 본성의 충족이라면 고통은 이것의 결핍으로 여겨진다.
어떠한 겪음의 상태와 만족의 상태가 생기고 유지되는 정도의 차이에 따라 쾌락으로 혹은 고통이 되기도 이야기된다.
따라서 이러한 것들은 어떤한 성질로 정의되기 어려운 것일뿐만아니라 한정되지 않은 것으로 보여진다.


좋음(선)은 궁극적인 것이고 완전한 것이다.
또한 그 자체로 목적이되는 것이고
불변하는 것으로
항상 유지되고 지속되는 것이다.
이것은 한정된 것으로 그자체로 존재하는 것이다.


쾌락은 운동이나 생성되는 것들이라기 보다는 전적이고 궁국적인 것(좋음/선)의 실현속에서 부수적으로 생겨나는 것이고 도리어 이 궁국적인 활동에 수반되어 나타나는 쾌락이 더해져서 인간의 덕있는 활동이 완전하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쾌락이 훌륭한 감각과 훌륭한 감각적 대상의 결합에 의해 인간의 활동을 완전하게 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인간의 활동을 완전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좋은 능력을 지닌 눈이 눈의 고유한 대상이 아름다운 색깔과 모양에 관계하고
좋은 능력을 지닌 귀가 귀의 고유한 대상이 아름다운 소리들에 관계하지만
쾌락을 행하게 하는 인간의 주관이나 이에 상응하는 고유한 쾌락이 대상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사실 누구나 살기를 소망하고 또한 쾌락을 욕구하지만 살아간다는 것은 인간의 근본적이고 자연적인 성향이자 끝없는 행위이자 근원적인 활동이다.
사람마다 그 자신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것을 자신의 고유한 능력을 가지고 행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에겐 다양성이 있으므로, 쾌락이나 고통에 대한 선호(소망이나 회피)가 차별적일 수 있다. 그러나 좋다고 생각되는 쾌락들 가운데 어떤 종류의 쾌락이 인간에게 고유한 것인가 ? 이것은 이 것에 대응되는 활동속에서 명백해질 수 있다.
따라서 완전하고 더할 나위없이 행복한 사람의 활동이 한가지이다 호은 그 이상이다 할 수 있지만 이러한 활동을 완전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엄밀한 의미에서 인간에게 고유한 쾌락일 것이다. 그 이외의 쾌락은 부분적이고 혹은 이차적인 혹은 부수적인 것들이라 할 수 있다.


행복은 궁국목적이다.
행복은 자족적인 활동이다.
그리고 그 자체로 바람직한 활동이다.

이에 반해 오락은 일종의 휴식이다. 이는 우리가 계속해서 일(활동) 할 수 없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휴식은 하나의 목적이 아니다. 휴식은 활동 때문에 취하는 것이다.

행복한 생활은 덕있는 활동일 것이다. 이는 노력을 요하는 것이고, 그 자체로 바람직한 것이다. 그저 오락이 되기는 어렵다.
결국 행복은 최고의 덕을 따르는 활동일 것이다.
이 으뜸가는 덕이야말로 우리들 속에 있는 최고의 부분인 이성의 덕(훌륭함 혹은 탁월함 /arete) 에 의한 활동이다. 그러기에 관상의 활동(theoria)이야말로 우리의 본성을 지배하고 인도하며 신에 가장 가깝게 도달한 아름다운 것으로 인간 고유한 것으로 혹은 신적인 능력이라고 하든 간에 이것의 활동이 완전한 행복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행복은 한가속에 있다고도 할 수 있으나 실제로는 비한가적인 것이다. 또한 철학적 예지(순수한 지혜 /sohhia)의 활동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러한 활동은 지속적이며 제약받지 않으며 인간에 있어 가장 고귀하고 순수한 지성(nous)에 따른 활동이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신적인 것에 다다르게 하는 활동이다.

관상적 활동과 구분되는 인간적인 다른 활동이 있는데 이것은 신체나 사물이나 감각에 의해 겪게되는 것(pathos)이 의지(의도한 것, 의도하지 않은 것)와 더불어 행위가 서로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윤리적인 덕이고 실천적인 지혜가 결합된 합성적인 본성의 덕이라 볼 수 있다. 이에 반해 이성적인 덕은 이러한 신체와 정감이 관계하는 운동과 변화의(생성의 세계)와는 따로 존재하는 독립적인 것이다.

본성에 의해서 선(좋고/ 아름답고/ 훌륭해지는)하게 되는 것은 자연적인 성향에 의한 것이라 볼 수 있고 ....
관습에 의해서 선하게 되는 것은 윤리적인 덕(중용)에 의해서이다.
교육에 의해서 선하게 되는 것은 이성적인 덕에 의해서이다.

이성과 올바른 창조(만듦/제작)를 따르는 생활을 통해 스스로를 통제하고 일상적인 삶에 관계하는 실천적 지혜를 보존하는(sophrosine/절제) 하는 힘이 필요하게 된다. 이러한 힘은 법률이라는 실천적인 규범을 통해 구속력을 지니게 된다. 결국 법률은 실천적인 지혜(앞서 헤아리는 것- 분별력 혹은 사려/phronesis)와 이성에서 우러나오는 규칙이다. 이것은 보편인식에서 경험적으로 받아들이는 개별적인 기술(techne)이다.
바로 정치가의 자질이 되는 것이다.

행복(eudaimonia)

행복은 글자 그대로 혼(daimonia)을 잘(eu) 돌보는 것(최선의 상태-좋은(선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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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몬은 숲의 정령을 혹은 자신을 돌보는 수호신 이나 혼을 혹은 죽은 영웅이나 조상를 격조있게 부른 말


좋음(선)에 대한 앎과 관련된 혼의 참된 돌봄
(인간에게 주어진 고귀한 신적인 능력인 지성(nous-noesis)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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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 mesotes
희랍인들의 중용사상은 일상생활에서 사용되는 격언에 잘 나타나 있고, 술잔과 같은 일상적인 도구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적도가 최선이다 metron ariston’는 격언과 적정 수준을 넘으면 아예 다 쏟아지도록 고안된 사모스의 용기가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중용에 관한 한 특별한 영향을 끼친 인물은 피타고라스이다. 피타고라스는 최고음과 최저음의 조화평균과 산술평균에 주목하여 전체 옥타브가 이루는 협화음의 체계를 하르모니아harmonia라고 말했는데, 이 낱말은 조화, 조율 등으로 해석된다. 그런데 여기서 평균이라는 말은 중용 mesotes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하다. 피타고라스는 더 나아가 온 우주 kosmos가 하르모니아에 의해서 조종된다고 말하는데, 이 kosmos는 아름다운 질서체계이며 조화의 극치를 나타낸다.

희랍인의 정신과 피타고라스의 학설에 포함된 중용사상은 플라톤에 의해서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플라톤은 인식론적이고 존재론적인 근거로 좋음 to agathon의 이데아를 제시하는데, 이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앎이 최대, 최고의 앎이다. 이 좋음의 이데아는 형상계를 지배하는 원리일 뿐만 아니라 자연, 인간의 기술, 실천적 행위에 두루 근원적인 원리로서 작용한다. 따라서 자연현상과 인간행위의 근원적인 원인설명은 ‘좋음과 적절함’이 근원적 원리로 채택될 경우에만 가능하다는 것을 플라톤은 강조한다. 우주의 생성과 관련해서 그 생성을 아름다움과 좋은 상태의 실현의 관점에서 보면서, 이것이 질서부여와 균형 및 적도실현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설명해 보인다. 여기서 이 좋음의 상태의 실현은 적도 to metron 또는 균형 to symetron과 연관되어서 이루어진다는 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플라톤의 관점에서는 온갖 적도와 균형 그리고 알맞음 등의 현상들이 저절로 실현되어있거나 실현되고 있는 곳이 바로 자연의 세계이다. 그런 세계, 그런 환경 속에서 살고있는, 살 수밖에 없는 인간이 따라야 할 바도 이를 미루어 분명해 진다. 참된 의미의 인간의 기술도 적도창출에서 성립한다. 실천적 기술로서의 통치술이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도, 인간의 온갖 실천적 행위들이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도 다같이 적도이다. 이 적도가 인간의 실천적 행위와 연관될 때, 우리는 그것을 중용이라고 한다. 플라톤이 [법률]편에서 자유와 우애, 지성이 확보된 나라의 수립을 목표로 하는 입법자가 법제정에서 언제나 유념해야할 기준도 적도에맞는 것들, 즉 중용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한 가지는 플라톤에 있어서 철학적 인식 내지 지혜가 헤아림 내지 분별을 수반하는 실천적 지혜와 구별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실천적 지혜와 중용은 어디까지나 행위 praxis의 문제와 연관된 것일 뿐이다. 다시 말해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중용의 문제가 다루어지는 것은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행복한 삶이 어떤 것인지를 밝히기 위해 행복 eudaimonia의 문제를 다루는 가운데 부딪치는 곁가지로서이다. 플라톤과는 달리 중용으 문제가 윤리학의 과제로서다루어지는 것은 바로이 곁가지, 즉 학문영역의 분류작업의 소산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들이 택하는 행복한 삶에는 향락적인 삶, 정치적인 삶, 관상적인 삶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 중 어던 삶의 유형이 완전한 행복을 누리게 해주는것인가는 사람의 구실 ergon , 즉 사람을 사람답게 해주는 가장 참된 기능의 고찰을 통해 밝혀진다. 사람으로서의 훌륭함arete, 즉 덕은 이 사람구실을 하는 활동 energeia이나 이를 하게끔 된 상태를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크라테스,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이성 logos이나 지성 내지 정신 nous이사람을 사람답게 해주는 기능이라고 보았다. 그가 관상 theoria을 인간의 최선의 활동으로 보고 가장 행복한 삶을 거기서 찾은 것도 지성을 인간의 최고의 기능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 중용은 인간에 있어서 비이성적인 것과 이성적인 것의 상호관계의 설정을 위한 준거로 제시된 것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혼 또는 마음에는 비이성적인 면과 이성적인 면이 있는데, 각각은 비이성적이면서도 이성을 따르게 되는 그런 쪽과, 그 본뜻에 있어서 이성을 지니고있는 쪽을 뜻한다. 사람으로서의 훌륭함, 즉 덕도 이런 이중적인 이성을 지닌 면에 따라서 분류되는데, 전자는 철학적 지혜와 실천적 지혜로서 오랜 기간과 체험을 필요로 하는 가르침을 통해서 생기고 증대되는 것으로 지적 훌륭함이라고 일컬어 진다. 반면에 후자는 절제나 너그러움처럼 습관의 결과로서 생기는 것으로서 윤리적인, 실천적인 훌륭함이라고 일컬어 진다. 이 인격적, 윤리적 훌륭함이 습관을 통해 형성된다는 것은 플라톤과 마찬가지인데, 이것은 ‘주어진 것을 선용하라 to paron eu poiein’는 희랍의 격언을 그대로 드러내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이 지니게 되는 모든 훌륭함을 그것이 인격적, 윤리적인 것이든 지적인 것이든간에, 그것이 일단 체득, 실현되어 있는 이상 곧 ‘습성 hexis’ 내지 ‘굳어진 상태’로 본다. 사람의 훌륭함은 그것으로 인해서 그 사람을 훌륭하게 하고 또 그것으로 인해서 그가 자신의 기능을 잘 해내게 되는 그런 습성 내지 굳어진 상태라고 말한다. 그런데 중용과관련해서 이 습성이나 굳어진 상태는 중간상태를 목표로 한다. 즉 훌륭함(덕)은 중간상태를 목표로 하는 일종의 중용이다. 그러나 이 중용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유동적인 것이며 따라서 선택을 요하는 것이다. 훌륭함은 선택과 관련된 굳어진 상태로서 우리들과 상관관계에 있는 중용에 있는데, 이는 이성에 의해서 그리고 행위와 관련해서 지혜로운 자가 결정함직한 방식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결국 중용에 따른선택에도 지혜가 필요하게 되는데, 이지혜는 불변의 고정된 것이 아니라 달라질 수 있는 대상들에 관계한다. 인간으로서 어쩔 수 없는 필연적인 것들은 선택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행위와 관련해서 지혜로운 자의 기능은 이러저러한 행위의 목적을 위한 것들을 훌륭하게 심사숙고함이다. 다시 말해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실천적 지혜는 행위와 관련된 것이고 행위와 관련되는 한, 그것은 보편적인 것 외에도 개별적인 것을 알아야 하고, 그 중에서 개별적인 것을 더 알아야 한다.

실천의 덕으로 <중용>을 내세우는데 중용은 산술적인 중간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산출하는 일률적인 계산법이 있을 수 없고 이성적 직관에 호소하는 것이다. 실천의 덕에서는 또한 중용의 표현이라는 결과뿐만 아니라 동기의 측면에서 고의적이 아닌 행위 즉 강제당한 행위와 모르고 한 행위가 있는데 강제당한 행위에는 책임을 물을 수 없고, 무지에 의한 것은 응당 알아야 할 바를 모른 것이므로 책임을 져야 한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적인 존재들을 포함한 모든 존재들을 존재론적 관점에서 다루는 철학을 제일철학이라 일컬었는 데, 이 제일철학이 곧 신학(theology)이며, 그의 제자들에 따르면 곧 형이상학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은 자연학(physics)과 제일철학 혹은 신학으로서의 형이상학이 중심을 이룬다. 제일철학이라 함은 으뜸가는 존재와 이와 관련된 으뜸가는 원리들 및 원인들을 다룬다는 뜻에서 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기본적으로 존재자(to on)를 공간 안에 실재하는 개체(tode ti)로 보고 이를 제일실체 내지 본래적 의미의 존재라고 했다. 이 개체는 질료와 형상의 합성체이다. 그리고 종으로서의 형상은 개체의 본질로서 제 2 실체라고 했다. 판단에서 주어는 일반적으로 개체인 제일실체이며 존재론적 탐구의 대상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를 개체 자체로 본다. 그에게서 존재는 개개의 사물로 한정되고 이 한정을 벗어나는 유일한 존재가 신이다. 플라톤에서 nous에 의해 알려지는 존재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신 뿐이다. 기본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 존재는 공간적 의미의 존재, 즉 질료적인 존재이다. 그는 이전의 자연철학자들의 관심인 사물들이 <무엇으로부터 이루어졌는가 ex hou>가 아니라 사물들이 <무엇에로 향하고 있는가 eis ho>에 관심을 갖는다. 그의 자연적인 존재에 대한 이해의 기본도식은 바로 이 관심으로부터 나온다. 자연적 존재들은 자신들 속에 있는 어떤 원리들 arche로 인해 지속적으로 운동 kinesis을 하여 어떤 완성에 이르는 것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 경우 원리란 본성 physis을 가리키지만 이 본성은 이중적인 것이다. 한 가지는 지속적으로 질적인 변화로서의 운동을 하여 일정한 단계에 이르게 되는 기체에 있어서의 질료 hyle이고 다른 한 가지는 이 기체가 실현하게 될 형상 eidos이다. 기체란 질적인 변화를 겪고 있는 즉 운동을 하고 있는 사물을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질료를 본성이라고 할 때에는 자연 속에서 존재하는 하나의 사물이 그 생성과 더불어 지니게 된 자연적 성능을 일컫는 반면, 형상을 본성이라 하는 것은 그것이 지닌 성능이 최대의 실현을 본 단계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 질료적 단계가 가능태 dynamis이고 실현된 상태가 활동태 내지 현실태 energeia이다. 현실태라는 말은 어떤 것이 수행하게 될 기능 내지 구실이 실현되어 있는 상태라는 뜻과 그것이 지금 수행되고 있는 상태라는 뜻을 동시에 담고 있다. 한 사물에 있어서 기능 내지 구실(ergon)은 그 출발단계에서 볼때는 목적(telos)으로 되는 바의 것이고 완성의 단계이다. 이 실현을 본 상태를 완성태 entelecheia라고 한다. <현실태 energeia와 완성태 entelecheia는 결국 같은 뜻인데 다만 기능 내지 구실의 관점에서 말하는 것인가, 실현 내지 완성의 관점에서 말하는 것인가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론을 제일철학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제일이란 으뜸가는 존재와 존재 그 자체, 그리고 이와 관련된 으뜸가는 원리(arche/principle) 및 원인(aitia/cause)을 다룬다는 뜻이다. 이처럼 모든 존재)ousia)에는 그것들이 실현하고자 하는 목적(telos)으로서의 형상(eidos)이 내재해 있고 이 각각의 목적들은 궁극적으로 외재적인 목적인 신(theos)과 연관되는 목적 계열에 있기 때문에 이 철학을 신학(theology)이라고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의 핵심은 질적 변화로서의 운동과 신의 사유활동 그리고 이에 대한 관상(theoria-깊숙히 바라다보며 사유하는 활동)이다.

존재의 양극성 : 형상은 일반화의 원리, 종적 규정의 원리
질료는 개별화의 원리, 개별적 존재의 원리
이 양자를 합쳐서 본래적 의미의 존재 즉 ousia가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ousia의 보편적 측면인 형상에 중심을 두었지만 질료적 측면을 동시에 동등하게 인정하였다. 따라서 존재는 전적으로 보편적인 것도 개별적인 것도 아니다.

혼 psyche : 생존하는 것은 질료 내지 기체와 형상의 복합물이다. 몸은 질료이며 그 몸의 형상 내지 현실태는 그것의 생명 즉 혼이다. 따라서 혼은 유기체의 현실태이다.

삶의 궁극목적(핵복)과 덕 : 인생의 궁극목적이 갖추어야 할 두 가지 성질은 궁극성과 완전성이다.행복은 이 두 가지 성질을 갖추고 있는데 행복하다는 것은 <잘 산다, 잘 한다>는 뜻이다. 잘한다는 것은 행위자가 자신의 기능 ergon을 잘 발휘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으로서 인간의 기능을 잘 발휘하기 위해서는 어떤 특수한 기술을 잘 발휘하기 보다는 사유를 본질로 삼는 이성적인 기능을 잘 발휘해야 한다. 그러나 이성의 일시적인 발휘만으로 행복이 될 수 없다. 이성을 항상 발휘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하는 경향 내지 <습성>이 필요하다. 이 습성이 곧 덕 arete 이다. 덕은 그 자체가 행복이 되는 것이 아니라 행복의 필수적인 바탕인 것이다.

덕론 arete : 덕은 이성을 항상 잘 발휘하는 습성이며 삶의 궁극목적인 행복을 위한 기본조건이다. 그런데 덕에는 사물의 이치를 인식하고 항상 올바른 행동을 계획하는 지적능력인 <이론의 덕>과 이성의 인식과 계획에 따라서 늘 올바른 길을 선택하는 행동의 능력인 <실천의 덕>이 있다.

이론의 덕 :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론의 덕의 우위를 인정한다. 인간의 본성 가운데 가장 고귀한 것은 이성적 기능이며 이성적 행위 가운데 가장 귀중한 것이 이론적 인식 즉 철학적 진리의 파악이다. 그리고 파악된 진리를 명상함 즉 관조하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다.

기능 ergon과 이론적 덕으로서의 행복 eudaimonia : 모든 생물은 저마다 자신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본성으로 갖는다. 이 때 이 능력 또는 기능을 dynamis, 그 실현을 현실태 energeia, 그 과정을 운동 kinesis이라 한다. 각각의 ergon의 실현은 형상의 실현이며, 운동에 의해 현실태에 이르는 것이 각각의 목적 telos이다. 이 때 형상은 본질이요 한 사물의 참된 본성이며, 형상의 완전한 실현은 그 기능의 완전한 수행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사람의 고유한 기능은 nous의 사용에 있다. 사람으로서 제 구실을 한다면 그 목적은 <이성적인 능력의 지속적인 사용>이 될 것이다. 이성적인 능력을 통해서 철학적 진리를 파악하고 그 진리를 명상하는 즉 신적 지성에 대한 사유 즉 관상 theoria에 행복이 존재한다.

06-04-04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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