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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시간 수업의 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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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진논술 작성일07-07-02 21:09 조회1,60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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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논술 이진선생님의 첫수업주제입니다.

 

 

 

 

제1주제: 외눈박이 벗어나기

 

 

1. 차례를 지킵시다는 말을 비판하라...

 

첫수업의 풍경

 

뭐..차례를 지킵시다는 말을 비판하라고요?????

 

황당한 표정을 짓는 이른바 공부엔 도사들인 논술 준비생을 보면 즐겁다. 아니 통쾌하다. 요넘들...너희들 오늘 딱 걸렸어...이런 맛에 논술 강의 하는거지....

이제 녀석들은 자뭇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난 안다 그들은 생각하는 척만 한다는 걸...., 녀석들은 아직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 조차 모르고 있다는 걸.

 

세상에서 제일 답답한 일이 무엇일까? 바로 어떤 일을 해결해야 하는데 무엇을 먼저 고민해야 할지조차 모른다는 사실이 아닐까?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지식은 애매한 것이 없다.

 언제나 명확하게 정답과 오답이 똑 떨어진다. 애매한 것은 시험에 안 나온다. 따라서 공부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아는 것은 오직 정답이다. 그것이 참이고 진리이다.

 

 

차례로 줄을 서야 한다.

 이 말은 내가 태어나 사회에 첫발을 내딛은 유치원에서 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배워온 의심할 수 없는 참이요, 진리요, 도덕이요, 행위의 기본이다.

그런데 이 말을 비판하라니? 내가 아는 진리와 상식을 부정하라니?

 

위의 글은 선생님과 학생의 입장에서 각각 바라본 첫 시간의 모습이다.

교사의 의도와 학생의 막막함에서 논술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의 답이 나온다. 바로 논술은 사고력의 문제이다. 선생님의 의도는 학생들의 인식에 대한 고정된 사고를 깨는 것이고 학생들이 느끼는 황당함은 바로 그 틀을 깨는 작은 시작인 것이다.

오늘날 지식 정보화 사회에서 더 넓은 생각. 더 다양한 생각을 바탕으로 한 창의력과 개성이 중시된다. 그런 창조적이고 개성적인 사고를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바로 기존의 고정되고 절대적인 지식, 상식, 생각, 가치관, 자아관......뭐 이런 것부터 깨어 져야 함은당연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고정되어 있으면 편견이 나타날 수 밖에 없다.

편견을 가지고는 세상을 올바르게 바라 볼 수 없는 건 당연하다.

편견을 가진 눈으로 세상의 복잡한 문제를 풀 수 없는 일 아닌가? 편견을 가지고 사람들이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는 불가능한 일 아닌가? 편견을 가지고 사람들을 설득하고 편견을 가지고 사람들을 리더 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편견을 가지고 이른바 남들이 말하는 명문대학을 나와서 사회의 지도자가 될 수는 없는 일아닌가?

(2002년 이대문제, 절대화되고 고정화된 가치 평가 체계는 정당한가?. 고대, 서울대.: 올바른 앎이란 무엇인가?)

 

그래서 논술의 기본 주제는 항상 인식의 문제이다. 앎과 진리., 참과 거짓의 문제이다.

 

참이라는 것

참이라는 것, 진리라는 것이 존재 한다는 생각은 과학 지상주의 시대에 잠시 유행했던 생각에 불과하다.

군대에서는 진리는 고참의 말이다. 왕조 시대에는 왕의 말이 진리였다. 고대의 재정 일치사회나 중세의 신 중심사회에서는 무당이나 신의 말이 참이요. 진리이다.

이렇게 보면 진리나 참이라는 것이 시대나 사회 또는 문화의 영향을 받는 상당이 변화무쌍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쯤 되면 “차례를 지킵시다”는 말도 이제 슬슬 본색이 드러나게 된다.

적어도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다르게 인식할 수 있겠구나...그럼 어떤 논리와 예를 들어 비판하지?

 

이게 바로 사고의 시작이다.

그럼 이제 이 문제를 화두로 삼고 하나 하나 파헤쳐 보자.

여러분은 버스 승강장에서 먼저 도착한 순서대로 차례로 줄을 서는 게 왜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는가?

이성적으로 판단해 볼 때 먼저 온 사람이 먼저 타는게 이치에 맞기 때문이다. 바로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럼 이런 공식이 성립한다.

합리적인것- 옳은 일. 참.

비합리적인 것- 옳치 못한 일, 거짓.

이렇게 논리를 세우면 뭔가 찜짐해 질것이다.

 

이건 아니잖아....??? 버스나 지하철에서 할아버지에게 자리 양보하는 건 합리적이건가????? 아닌데...그럼 그건 옳치 못한 일이 되는 걸까? 이건 아니잖아~

 

이제껏 내가 알고 있는 상식도 하나의 편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이제 받아 드려야 한다.

우리는 이제껏 합리적인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잘못된 인식의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도시를 떠나 한 시골 마을의 정류장 풍경을 생각해보자.

작은 마을의 버스정류장에 많은 동네 노인분들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그곳에 제일 먼저 도착한 한 젊은이가 막 도착한 버스의 문 앞에 서서 “차례를 지킵시다” “줄을 서세요 줄을.....”하고 한심하다 는 듯이 소리 친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도리어 그는 천하의 버러장머리 없는 놈으로 낙인찍혀 그의 부모까지 욕을 들어 먹을 것이다.

자? 그 시골 노인들을 이치를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비난 할 것인가?

이치를 모르는 것은 시골의 노인들이 아니라 바로 젊은이가 아닌가?

바로 똑같은 상황에서도 도시의 이치와 시골의 이치는 다르다. 도시의 이치는 뭔가 딱딱하고 빈틈이 없고 숫자적이고 기계적이다.

반면 시골에서의 이치는 자연스럽고 인간적이며 여유로움이 뭍어 있다. 사람 사는 냄새가 난다. 그렇지 않은가?

 

 

동양의 이치와 서양의 이치

 

도시의 이치가 서양의 것이라면

반면 시골에서의 이치는 우리의 오랜 민족사 전반에 이어온 고유한 정서적 이치이다.

차례로 줄을 서는 것이 합리적인 질서라는 인식이 우리 사회에 들어온 것은 불과 몇 십년전의 일이다. 본격적인 경제 개발이후 서구적가치가 물밀듯이 유입될 때 비로소 우리에게 선보였고 이른바 신식교육이라는 서구식 교육을 받은 이들에게 의해 전파된 인식이다.

그리고 그 서구적 인식은 오늘날 우리의 인식체계를 서구화 시켜 버렸다.

물론 수 천년을 이어온 전통적인 고유의 인식체계가 하루 아침에 바꾸어 지기란 불가능하다. 교육을 바꾸어야 하고 끊임없는 사회 계몽활동을 펼쳐야 한다. 아직도 거리 곳곳에서 우리는 수많은 계몽구호들을 만난다.

질서를 지킵시다. 화장실을 깨끗이 사용합시다. 공중도덕을 지킵시다.

왜 우리는 서양 사람들은 당연하게 지키는 이런 일들을 지키자고 떠들어야 하는가?

아~~ 계몽의식이란 바로 질서의식의 서구화를 말하는 것이었네

그럼 우리는 이제껏 우리의 전통적인 인식체계를 낡은 것, 버려야 할 것, 틀린 것. 귀찮은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서구적 인식이야 말로 바람직하고 지향해야할 선진적인 것으로 받아 들일 것을 강요했구나....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낸다는 이야기처럼 서구 중심적 사고와 교육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편견인 것이다.

우리 민족에겐 수 천년을 이어온 서양의 이치와는 다른 우리만의 유구한 질서를 만드는 이치가 있었다. 바로 장유유서의 이치. 인간 중심의 이치가 그것이다.

아~~ 이제 느낌이 오네.. 우리에게 아직도 줄서기. 공중도덕들의 서구적 질서의식이 잘 지켜지지 않는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의식수준이 문제가 아니라 바로 서양과 우리의 인식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잖아.....

우리나라사람들이 왜 질서의식이 없는지 설명 할 수 있을 것 같다.

왜 동양 문화권의 인도나 중국이나 우리나라나 동남아 사람들이 무질서 한지도 설명해 낼 수 있을것이다.

우리나라나 동양권사람들의 이치는 그게 아니기 때문이다.

동양과 서양은 인식론은 그 역사부터 다르다.

사물을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서양은 합리적인 것을 존중했다면 동양은 인간적이 것을 존중했다. 서양 근대 인식론의 출발이라 할 수 있는 데카르트는 우리나라로 치면 임진왜란시절 이순신장군이 남해 바다에서 왜군들을 소탕할 때 태어나 그 30년 후 비로소 서양 인식론의 기틀을 만들었다.

참과 거짓을 구분하는 방법을 정리한 책 방법 서설(1637) 은 우리나라 병자 호란 시절에 출간되었다.

아무리 계산해 봐도 350년 남짓이다.

그럼 동양의 행위 표준인 예를 만든 공자나 내면적 정신 세계의 사상적 기초를 세운 노자는 기원전 500년경의 인물이다. 지금으로 부터 2500년 전이다.

350년과 2500년.

철없는 세 살박이 어린아이가 백발 노인에게 진리란 이것이 다며 까불었던 꼴이 아니던가?

우리가 생각했던 참은 불과 300년 유행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2. “나는 생각하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가 가져온 비극

 

 

서구 근대 인식론의 아버지라 불리는 사람이 누구죠?

이구 동성으로 대답한다. “데카르트~”

데카르트가 한 유명한 말은?

그것도 모를까봐 하는 표정의 시시한 목소리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는 대답이 들려 온다.

선생님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다시 질문을 던진다.

그럼 이 말이 인류에게 미친 영향을 나름대로 정리해서 말해 볼 사람?

..........................................?

..........................................?

이런식의 시험 문제는 없었기 때문이다.

시험에 안 나오는데 골치 아프게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논술이다.

논술은 이렇게 나온다. 시험에 나오니까 이제 준비해야 하고 골치 아픈것도 생각해야 한다.

하지만 그리 골치 아픈것도 어려운 것도 없다.

이제껏 대충 알고 있던 것들을 그냥 체계화 시켜내면 된다.

꼭 알아두어야 할 개념

지식의 체계화....이것은 21세기에 아주 중요한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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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논술 작성일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의지와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사회에 내던져진다. 눈을 뜨는 순간 타인의 얼굴을 보며, 혹은 타인의 얼굴을 보지 못하더라도 인간이 만들어놓은 문명을 접하게 된다.

뿐만 아니다. 눈을 뜨는 순간 나는 내가 선택하지도 원하지도 않은 '가족'이라고 명명되어 있는 공간에 속해야만 한다.

 

내가 원했나?? . . .

 

강제로 나의 거취를 정한 나의 가족이란 누군가들은 나를 자신들의 공간으로 데리고 간다. 그곳에서 나는 나의 부모라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배워가고 내 형제들과 이웃들이 누구인지를 배워가며 그들에게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배워간다. 그것은 매순간순간 나를 강요한다. 내 주위의 시선은 나의 행동을 평가하며 그들로부터 배운 여러 일상에서의 규칙들은 내 행동의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누구 맘대로?? . . .

 

이것은 단지 어떤 개인이나 혹은 개인의 삶의 일부분을 차지하는 모습이 아니다. 나 자체에 대한 평가, 내 행위의 선악, 내 사고의 모습 등등 사회의 정해져있는 기준과 사회의 시선은 이 사회에 속한 우리 모두를 정형화한다.

 

홉스의 리바이어던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러한 정형성은 우리에게 필요하다. 왜냐하면 자연상태에서 우리는 심각한 전쟁 상태에 놓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금 현대 사회에서 법과 같은 외면적인 틀과 도덕이나 규범과 같은 내면적인 틀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끊임없이 갈등하게 될 것이다. 실제로 국가과 국가간의 분쟁, 종교 분쟁등 세력이 커서 조정기구가 존재하기 어려운 집단들 사이의 분쟁을 보면 딱히 견제할 기준이 없어 무분별한 인명 살상이 자행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차례라는 것도 하나의 규칙이며 틀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차례를 지키지 않아야 할까?

 

정형화된 틀 속에서 살아가기에는 인간의 특성은 너무나 다양하다. 각 개인의 감정이나 상태 혹은 특성은 모두 다르다. 인간은 스스로 고유하며 각 개인의 고유성은 삶의 의미와 원동력이 된다.

 

비가시적인 것들, 비합리적인 것들, 꿈, 판타지, 비일상적인 것들 모두 인간이 살아가는 데에는 큰 의미를 준다. 날고자 하는 꿈은 비행기를 만들어냈고 세상을 탐구하고자 하는 욕구는 자연과학을 발달시켰다. 그러나 근대를 지배하고 있는 자연과학적 세계관은 그러한 설명되지 않는 것, 계산되거나 분석되지 않는 것들은 인식의 대상에서 제외함으로써 그 가치를 떨어뜨렸다.

 

왜 우리는 정해진 틀에서만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국가가 정해놓은 틀의 맥락 안에서만 선택의 자유를 가지고 있다. 국가는 나에게 정해진 것 중 하나를 고르고 행복해하라 한다. 그러나 내가 가지고 있는 고유성은 국가가 정해준 것들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나만의 기준을 만들어 내 삶의 의미를 발견하려 한다. 실제로 제도권 교육을 거부하고 자율적인 학교에서 자신의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안데르센 이후로 최고의 동화작가가 된 존 버닝햄은 정형화된 틀이 반드시 긍정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사례이다.

 

 
 
 
 
 06-12-29 00: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