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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술 예상 문제 10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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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진논술 작성일07-07-02 20:53 조회1,99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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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성 그리고 탈근대(脫近代)의 문제는 많은 대학에서 지속적으로 출제되는 문제이다. 논술이 근본적으로 ‘지금 여기’가 무엇인가를 묻는 질문이기에 근대와 탈근대의 문제는 실로 중요하다고 하겠다. 그 내용으로는 ‘근대의 의미가 무엇인가’ 혹은 ‘근대의 발전과정이 놓치고 지나간 것들의 의미’ 등 다양한 주제가 가능할 것이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파악해야 할 것은 근대 출현의 의미일 듯싶다.

1) 개인의 출현과 소멸

개인의 출현은 근대의 본질적인 문제다. 전근대로부터 근대가 성립했을 때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신분제의 해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신분적 구속으로부터의 자유로운 개인들을 출현시켰으며 17세기의 철학자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명제가 의미하듯 자신이 주변의 환경이나 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이성에 의해 비로소 존재한다는 명제다. ‘의심하는 나’는 무엇보다 진리에 이르는 출발점으로 잡았던 주체로서의 인간인 것이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 자유로운 인간의 새로운 발명은 너무나도 위대한 것이었지만 국민국가라는 거대한 사회적 체제를 만들고자 하는 역사적 과정은 이러한 자유로움에 대한 새로운 통제방식을 필요로 했다. 신이라는 절대적 윤리가 사라진 시대에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인 생존과 그것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저항은 인간의 기본적 권리임이 분명했지만, 이러한 권리들의 대립으로 인해 벌어지는 사회적 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와 국가라는 새로운 지배체제와 이념이 요청되었던 것이다.

결국 정책 실행을 위한 끊임없는 통계들이 축적되면서 발달한 통계학이나 개인의 관리를 위한 정교화된 관료제, 개인적인 삶을 통제하기 위해 고안된 감옥·학교·병원으로 대표되는 사회통제기구 등의 발달은 개인을 전체 속에서 움직이는 작은 부품으로 소외시킨다. 이성을 통해 세계의 주인인 개인의 행복을 추구했던 근대 사회의 역사는 결과적으로 모든 정보와 생산수단을 통제하는 구조적 제도를 완성시켜 감으로써 오히려 개인을 축소·소멸시키는 결과를 야기하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개인의 출현과 소멸’이라는 근대의 프로젝트는 중요한 논술의 주제이다. 서구 200년의 근대화 과정을 단숨에 따라잡고자 했던 한국의 조국 근대화 과제는 ‘지금 여기’의 모든 문제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로운 21세기의 ‘개인’의 필요성은 탈근대의 과제와 맞물려 있다. 새롭게 대두된 개인의 역사적 등장은 사회의 다양성과 다층성을 확대시키고 사회는 점차 국가의 절대적 통제를 벗어나서 상대적 자율성을 지닌 체계로 변모하게 된다. 이제 국가는 개인을 통제하는 수단이 아니라 개인의 욕구를 최대한 만족시킬 수 있는 체제로의 변화를 요청받고 있다.

2) 근대적 합리성 비판

두 번째의 주제는 근대가 낳은 합리성에 대한 문제일 것이다. 이는 20세기에 들어오기 이전 독일의 사회학자인 막스 베버에 의해 예견된 적이 있다. 제도화된 권력에 근거한 통제는 근대 이성주의자들이 고안한 통제형식이다. 이런 통제 조직의 전형이 바로 관료제이다. 근대가 성립하는 과정에서 이전보다 훨씬 광활한 지역을 관리하려다보니 각 지역의 인구변동과 생산력, 토지관계, 가족관계 등의 수치가 통계적으로 파악되어야 했고 각 지역의 치안행정 등을 해결하기 위한 체계적인 관료제도가 필요해진 것이다. 더욱이 교회의 권위가 약화되면서 교회가 담당하고 있던 일상에 대한 관리기능까지도 국가가 담당해야 했으니 관료제도는 점점 정밀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관료제를 통해 많은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효율성이 중시되어야 한다. 때문에 이성적으로 구조화되고 조직화된 위계적 제도가 요청되었다. 여기서 사람들은 특정한 책임을 맡고 규칙이나 성문화된 규정, 그리고 자신들보다 높은 지위의 사람들이 행사하는 강제수단에 따라 행동하게 된다. 이러한 관료제는 일을 조직하는 데 있어서 예전의 방법과는 달리 과거의 어떤 제도보다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고안된 형식구조를 취하게 된다. 제도화된 규칙이나 규정은 그 종사자로 하여금 목적을 이루기 위한 최선책을 취하도록 강제한다. 주어진 업무는 여러 부분으로 나눠지며, 각 부서가 주어진 업무의 정해진 부분을 책임진다. 일의 전말을 아는 사람은 좀처럼 존재하지 않으며 일에 대한 구상과 실행이 분리되는 현실이 빚어지게 되는 것이다.

베버는 이러한 과정을 ‘합리화 과정’이라고 한다. 즉 업무의 성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효율성은 합리화 과정의 주된 목적이 되고, 사람마다 달라질 수 있는 일의 순서를 규정을 통해 가장 효율적으로 정식화함으로써 예측 가능한 단계로 확정한다. 또한 모든 인간 생활의 양태는 일의 효율성을 위해 수량화되어 계산 가능해지고 이러한 규칙화와 수량화는 인간을 통제하는 무인기술로 작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형식합리성’이며, 이는 인간이 주어진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최적의 수단을 추구하는 것이 규칙과 규정 그리고 보다 큰 사회구조를 정화시키는 과정에서 결정됨을 뜻한다.

다른 한편으로 관료제 조직이 점차 비대해지고 그 위계질서가 불변하는 것으로 고정될 때 인간소외를 부추기는 권력기구가 된다.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단계에만 익숙해져 무언가 덜떨어진 인간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컨베이어벨트에서 부속품 하나만 하루종일 끼우는 노동자는 더 이상 세계의 주인으로서의 이성적 존재는 아니다. 베버는 이러한 현상을 ‘합리성의 쇠감옥’이라고 표현한다. 그 합리성이란 형식 안에 갇혀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그들의 기본적인 인간성마저 부정된다는 의미에서 쇠감옥인 것이다.

이에 대해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 하버마스이다. 그는 서로를 인격적 주체로 인정한 선상에서 이루어지는 만남의 관계를 ‘상호주관성’ 혹은 ‘상호인격성’이라고 한다. 상호주관성 차원에서는 더 이상 주객의 도식이 통용되지 않고 주체와 주체의 인격적 만남이라는 새로운 만남의 규칙이 형성된다. 이렇게 서로를 인격으로 인정하면서 더불어 사는 사회세계가 곧 생활세계라고 하버마스는 이야기한다.

이러한 생활세계 안에서는 도구적 관계맺음의 방식이 아니라 인격으로 만나는 사회적 행위를 통해 삶이 영위된다. 이 사회적 행위는 다름 아닌 의사소통의 행위이다. 의사소통에 참여한 사람들이 서로 진지하게 다양한 의견을 나누고 서로에 대해, 또 자기 자신에 대해 비판적이고 반성적인 태도를 취함으로 동의와 합의에 이를 수 있다. 이 의사소통이 가능하려면 그 과정이 자유로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공론장의 기능을 회복시키고 의사소통의 합리적 과정이 전제되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하버마스는 우리의 삶이 공장이 운영되듯 관리되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기술적 합리성에 우리를 내맡겨서는 안 되고 서로를 인격적으로 인정하여 대화와 토의에 의한 합의 도출의 절차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의사소통의 합리성과 공론장의 회복이야말로 또 하나의 대안일 것이다.

3) 근대적 시공간

근대성의 세 번째 주제는 시공간의 문제이다. 연대와 고대를 중심으로 출제빈도가 대단히 높은 주제이다. 느림의 의미를 묻는 문제나 속도 혹은 공간의 합리성 비판 등의 문제로 출제되었고 이른바 경제지리학이라는 교과에서 중심적으로 다루고 있는 문제라는 점에서 중요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예컨대 성균관대에서 기출된 문제는 프랜시스 케언크로스의 ‘거리의 소멸 - 디지털 혁명’,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 밀렌 쿤데라의 ‘느림’, 마이클 하임의 ‘가상현실의 철학적 의미’ 등을 제시문으로 출제하여 현대사회의 과학기술과 시공간의 체험방식을 묻고 있다.

매일 한 건물에서 다른 건물로 무리지어 옮겨다니고 저녁마다 이 과정을 거꾸로 되풀이했다는 사실과, 출퇴근을 위해서는 하루 두 번 이동량이 가장 많은 시간에 맞게 구축된 수송망이 필요하고 도로는 가장 혼잡할 때 교통량의 하중을 수용해야 하며, 통근열차와 버스는 최대한 승객을 수용해야 하는 근대적 삶은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삶의 공간과 노동공간을 분리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한 건물은 흔히 낮 동안 비어 있고 다른 건물은 대개 밤 시간에 비어 있기에 이러한 이동은 효율성으로 인해 비효율성이 증가하고 있다. 더욱이 근대적 시간은 시간 패턴의 개별화가 촉진되면 노동의 지루함이 감소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고독감과 사회적 고립이 증대할 수도 있다. 만약 친구나 애인 또는 가족 모두가 각기 다른 시간에 일을 할 경우 각자의 스케줄을 조정하는 데 도움을 주는 새로운 서비스 기능이 생기지 않는다면, 서로가 얼굴을 마주하는 사회적 접촉은 더욱 어렵다는 점에서 근대적 시공간 구조에 대한 성찰적 인식이 필요할 것이다. 결국 분절되는 시공간은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구상되고 실행되었다. 동시에 이는 시공간의 균질화를 통해 표준화된 가치를 만들고 이를 근거로 시공간이 화폐화되었다는 사실과 이 과정에서 인간의 소외가 촉진되고 기계 나사와 같이 도구적으로 대상화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4) 공리주의 비판

네 번째 주제는 근대성의 중심가치로서의 공리주의다. 이 공리주의는 윤리과목을 통해 학생들이 접한 적이 있다. 자주 출제되지만 깊이 있게 공부하지 못한 관계로 학생들에게 어렵게 느껴지는 문제이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명제로 정식화되고 있는 공리주의는 결국 민주주의의 구성원리인 사회계약론과 더불어 다수의 판단에 기초한 윤리적 합의의 원칙들을 만들어냈고 근대의 정신적 중심가치로 여겨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탈근대적 성찰의 요구가 필요한 주제이다.

첫째, 공리주의는 최대다수가 누리는 행복이 무엇이냐 하는 것에서 발생한다. 최대다수의 행복이란 행복의 총량이고 한 사회가 누리는 행복이 총량으로 규정될 때 그 과정에서 배분과 절차의 합리성은 배제된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예컨대 구성원의 절반을 노예로 부리면서 사회 전체의 공리를 최대화하거나 우리 나라의 경우처럼 성장거점에 의해 발전을 추구한 전체의 발전을 위해 농촌의 희생을 전제로 도시를, 중소기업의 희생에 기초해 대기업을, 내수의 희생을 대가로 수출 중심을, 여성과 노동자의 희생을 대가로 남성과 자본의 가치를 발전시킨 경우에 과연 합리적인가의 문제가 남아 있다. 더구나 과연 행복을 수량화시킬 수 있는지의 문제도 역시 포함될 것이다. 비물질적인 행복, 예컨대 사랑이나 올바른 가치 등은 어떻게 판단되어야 할 것인지의 문제는 여전히 공리주의에서 판단할 수 없는 문제일 것이다. 그러기에 공리주의는 근본적으로 경제적인 문제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둘째, 최대다수의 이익을 공공성(公共性)이라고 전제한다면 공공성이 확보되기 위해 구성원 모두의 의사가 합리적으로 반영되어야 하며 그 이해관계가 합리적으로 조정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모든 문제가 합리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하더라도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다. 이는 다수의 소수에 대한 합리적 대화를 전제로 하고 있는데, 타자와의 대화가 불가능한 경우의 문제가 남아 있다. 만약 ‘합의할 수 없는 타자’일 경우가 바로 그것으로, 이를테면 국가의 내셔널한 기억을 위해 죽어버린 자들이 소환되는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아울러 미래의 타자들 역시 합의할 수 없는 타자이며 ‘우리’라는 이름 밖에 존재한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 등도 그러한 타자일 것이다.

셋째, 공리주의는 소수자의 희생을 통해 다수의 행복이 추구되고 소수의 희생은 전체의 발전을 위한 토양이며 궁극적으로 희생자의 이익을 위한 것이 전제 혹은 설득돼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희생은 공리주의가 추구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그러기에 ‘합의와 설득’이라는 공리주의의 전제는 무너지며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권력에 의해 강제화되는 것이 현실이다. 제국주의적 폭력이나 다수자에 의해 자행되는 일상의 파시즘이 바로 그런 것이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제출될 수 있는 것이 칸트의 목적론적 윤리설이다. 이는 윤리교과에 정리된 것처럼 인간을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라는 명제로부터 정언명령에 기초한 자유로운 선한 의지에 의해 온전한 도덕법칙을 찾고자 했다. ‘너의 행위의 준칙이 보편적 법칙에 준거하여 행위하라’는 의미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5) 위험사회론

최근에 과학기술이나 환경적 위기와 관련하여 자주 출제되는 주제이다. 과거에도 늘 위험이 존재했지만 지금의 위험은 과거의 그것과 현격하게 질을 달리한다. 이른바 합리화 혹은 근대화로 널리 알려진 발전 과정에서 부(富)는 체계적으로 확대 재생산되었고, 그와 동시에 위험은 부를 위해 감수해야 하는 우연적인 난관이 아니라 체계적으로 생산되는 정상적 개연성 혹은 필연성으로 변모하였다. 그 결과 부의 추구와 분배문제 이외의 다른 모든 것은 우연적이고 비정상적인 것으로 여겼던 산업사회가 그 정점에서 마주하게 된 것은 구조적 위험으로 가득 차 있는 아슬아슬한 위험사회이다.

결국 현대사회의 안전과 위험 문제는 산업혁명 이래 근대적 합리화 과정 전반에 대한 비판적 재평가를 요청하며 동시에 새로운 발전방향에 대한 새로운 모색을 절실하게 요구한다. 그런 점에서 독일의 사회학자인 울리히 벡은 저서 ‘위험사회’에서 이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그에 의하면 현대의 위험은 방사능과 같이 인간의 평상적인 자각능력을 완전히 벗어나며, 부는 소유할 수 있으나 위험으로부터 영향만 받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위험은 계층 간 차이를 넘어 전 계층에 평준화되어 있고 전 지구화되어 과학의 지위나 가족의 위상을 완전히 해체시킨다고 이야기한다. 더욱이 그로 인해 자본주의의 발전논리를 새로운 단계로 끌어올리며 비정치적인 것을 정치적인 것으로 만든다는 것이 이 문제의 핵심이다.

울리히 벡에 의하면, 위험사회는 새로운 근대화의 단계를 필연적으로 요청하는데 성찰적 근대화가 바로 그것이다. 이제 새로운 단계는 ‘배고프다’는 인식에서 ‘무섭다’는 인식으로 전환되고 불평등사회에서 불안전사회로 전환된다. 그 결과 결핍의 연대는 공포의 연대로 확산되는데, 이 과정에서 성찰성이 요구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찰성인데, 이는 단순한 반성이 아니라 현실과 자기 자신의 직접적인 ‘자기 대면’이다. 성찰에 맞딱드리게 되는 자리가 다름 아닌 위험의 자리이다. 결국 산업사회에서 재화의 분배문제를 둘러싼 갈등은 위험과 재해의 분배문제라는 새로운 갈등에 압도되어버린다. 위험은 중첩되고 개인은 끊임없이 가중되는 불안한 운명을 떠안아야 한다. 결국 그 자체가 성찰성이다. 성찰성은 회피하는 것으로서의 반성을 넘어서 어쩔 수 없이, 원하지 않아도 필연적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모든 문제와 모든 지구화 과정 그리고 모든 계급과 모든 이들이 격렬하게 부딪치는 자기 대면이다.

이 대면은 필연적으로 공공의 참여적 비판을 원천적으로 제약하는 근대적 삼권분립의 체계와 기술과학적 지식을 중심으로 구성된 전문가 체계라는 두 가지의 거대한 체계를 해체하고 재구성한다. 그런 점에서 성찰적 근대화 과정은 산업사회를 지탱해온 궁극적인 원리인 ‘진보’에 대한 성찰을 필연적으로 요구한다.

우리는 산업사회의 이 진보라는 이름으로 유례없는 풍요에 도취되는 한편, 숱한 위험을 견디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에게 요청되는 새로운 과제는 이 진보에 대한 맹신이 갖는 역설을 직시하고 인류문명을 좀 더 지속 가능한 기반 위에 세우는 과정이다. 바로 이것이 성찰적 근대화이다.

요즈음 각 대학의 논술 출제 경향을 보면 세계화의 맥락과 양상에 관련되는 문제들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세계화라는 현상은 단순히 하나의 맥락으로 정리되지 않는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그 양상 역시 마찬가지로, 문화적인 것에서부터 국제 정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 속에서 살펴볼 수 있다.

6) 자본의 세계화 대립과 갈등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말하자면 세계화 과정은 긍정과 부정의 양면성을 띠고 있다. 한편으로는 세계화 과정은 국가 간 갈등의 주요 원인인 쇼비니즘적 경향을 제어하면서 민족적 다양성 추구의 장을 여는 전지구적 공동체의 실현 과정이기도 하다. 이 맥락에서의 세계화는 긍정적인 의미를 강하게 띠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세계화는 시장의 질서로 지역 고유의 문화들을 재단하고 제거하는 양상을 보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런 맥락에서 부정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종종 방송언론을 통해 세계화 반대 시위를 본 적 있을 것이다. 특히 그 상징적 대상으로 맥도날드·나이키·스타벅스 같은 다국적 기업의 매장을 공격하는 사진이 보도되곤 한다. 맥도날드 시위 양상을 통해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세계화에 의한 이질적인 문명 간의 대립과 공존 문제다. 문명의 문제라고 했지만 해당 국가의 경제, 복지, 환경, 노동 등과 동떨어진 문명이란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이 문명의 문제는 다시 세계경제, 국제정치, 지구 환경의 문제로 확산되는 중차대한 문제가 된다.

이에 대한 논쟁은 과거에도 있었지만 빈부격차 확대와 더불어 더욱 편이 갈리고 있다. 반대하는 측은 부자 나라들이 세계화라는 ‘편리한 도구’를 이용해 가난한 나라들의 자원을 빼앗고 환경오염을 야기하며 나아가 전통적인 가치관까지 파괴한다고 비난한다. 이에 대해 “그 같은 감상적 반세계화 운동은 가난한 나라들을 더욱 가난하게 할 뿐”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세계화가 가난한 나라에도 분명히 발전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인도네시아에 나이키 신발공장이 없었더라면 그들의 생활은 더 나빠졌을 것이란 얘기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 세계적으로 빈부격차가 확대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국제정치적으로는 세계화가 초강대국의 이해관계를 관철하는 과정이기에 전세계에 획일화될 수밖에 없다는 부정적인 시선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 전 지구적 규모의 시민적 저항이 반세계화 투쟁 과정에서 불붙기 시작했다는 역설적인 긍정성을 내포하고 있다. 세계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은 이와 같은 양면성을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한편으로 획일화와 지역 문화 파괴의 부정성을 경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성큼 가까워진 세계의 다양한 문화들을 충분히 포용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7) 세계화시대의 문화 다양성

과학 기술과 통신 수단의 급격한 발달 등으로 인해 오늘날 세계는 ‘지구촌 이웃’이라는 인식이 가능할 정도로 통합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세계가 하나로 통합되어가는 상황에서 한 나라의 정치·경제·사회·문화·환경 문제는 그 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나라의 문제로까지 복합적 양상으로 부각되어 상호 첨예한 대립과 갈등을 한층 더 초래할 수 있게 됨은 물론 극단적으로는 테러나 전쟁 같은 반인간적인 행위로 비화되기도 한다.

이런 양상은 상대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은 채 자신의 논리나 주장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대립과 갈등의 근본적인 해결책 강구와 함께 그것을 최소화하려는 부단한 노력을 경주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문명권과 문명권, 국가와 국가, 개인과 개인의 관계가 대립과 갈등의 관계를 지양하고 우애와 협력의 관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태도가 필수적이다. 이러한 태도는 서로의 참모습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을 통해 갖추어질 것이다. 그리고 서로의 참모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로에 대한 선입관이나 편견을 최소화하고 대상을 다양한 시각과 심화된 인식을 바탕으로 바로 보는 태도가 필수적이다.

문화의 보편성과 다양성을 묻는 문제는 고등학교 교육과정을 이수한 학생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제시문을 이용하여 이를 통합 이해하는 능력을 함께 요구하곤 한다. 예를 들어 조선시대의 실학자 박지원(朴趾源)의 ‘능양시집서(菱洋詩集序)’에서 발췌한 글 등 우리의 ‘고전’을 통해 오늘날의 상황에서 주요 해결 과제로 대두되고 있는 문제적 현상을 해소하거나 줄일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볼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 고전이 갖는 현대적 가치와 의의를 두루 음미하도록 유도하는 문제가 출제 문제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8) 오리엔탈리즘과 자민족 중심주의

세계화의 주요한 특징은 서구 중심의 인식과 이데올로기이다. 사실 20세기 초만 해도 아랍인과 유대인, 터키인은 공존했고 이것이 실제 현실이었다. 그런데 서구적 근대화 과정에서 이들이 각각의 문화적 정체성을 지키려는 저항이 있었고 불행하게도 유대인과 이슬람인 사이에 갈등이 생겼다. 그리고는 미국인들에 의해 상정된, 이슬람인들은 나쁜 사람이고 유대인들은 좋은 사람이라는 ‘가상적 현실’이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새겨졌다. 이처럼 현재의 서구와 이슬람권의 갈등은 상당부분이 이런 ‘가상현실’에서 비롯되고 있다. 문제는 사람들이 때때로 이런 가상현실을 ‘실제현실’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저서 ‘오리엔탈리즘’에서 동양과 동양인에 대한 서양인 일반의 인식은 동양을 문화적, 이데올로기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동원된 제도와 학문에 의해 구성되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더 나아가 그는 제국주의 시대 이후 동양인들의 동양에 대한 인식 또한 이러한 서양의 학문적·문화적 지배 안에서 구성된 정치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자기 인식이 서양 위주로 재편된 인식이라면, 과연 우리는 이러한 자기 인식으로부터 어떻게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

오리엔탈리즘이나 배타적인 민족주의는 동일한 의식의 구조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자아와 타자를 끊임없이 분리하는 이분법적인 사고이다. 서구가 동양을 야만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것도, 혹은 일본이 대동아 공영권을 주장하며 서구를 적대시하는 것도 모두 그러한 중심주의적 발상에서 비롯한 것이다. 우리 사회가 외국인 노동자에게 보이는 식민지 민족주의의 이중성 역시 서구와 비서구의 이중적 잣대가 내면화된 오리엔탈리즘과 같다.

이 주제와 관련된 논제는 오리엔탈리즘이 나타나는 구체적인 현상이나 원리 등을 보여주면서 이런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를 묻는 형태가 대부분이었다. 타자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라는 중심주의를 끊임없이 해체하려는 자기 노력과 자기 성찰이야말로 근대화 과정에서 형성된 서구중심주의적인 폭력에서 벗어나서 타자와의 참된 만남을 실현할 수 있는 진정한 길일 것이다.

세 번째의 큰 주제는 정보화와 과학기술을 함께 결합하여 제시되는 형태의 문제들이다. 여러 가지의 주제들이 가능하겠지만 생명복제 문제와 정보과잉 문제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9) 생명복제 시대의 인간

생명복제 기술은 현재 과학기술이 도달한 가장 첨단분야로 가장 첨예한 사회적·윤리적 쟁점이 되고 있는 분야이다. 기술의 발전이 언제나 윤리적 문제와 충돌한다는 사실은 물리학의 발전과 핵무기, 정보기술의 발달과 보안문제 등의 사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배아복제를 중심으로 하는 유전공학 분야의 현재 복제기술 연구는 인간을 그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 윤리적 문제의 정도가 다른 사례와 크게 차이가 난다. 예를 들어 인간복제의 경우에는 그 실험과정에서 배아 상태나 태아 상태의 인간을 실험대상으로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복제는 전세계 어느 나라도 법적으로 금지하고 있지만 이러한 금지가 우리에게 확실한 안전망이 되지는 못한다. 현재 복제기술은 인간복제의 금기를 피하기 위해 배아복제, 줄기세포배양 등의 기술적인 출구를 찾는 데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으며, 심지어 모 종교단체에서는 인간복제 자체를 실험했다고 발표하고 있다.

이제 복제기술은 우리 곁에 엄청난 속도로 다가오고 있다. 영화에서 보는 공상과학적인 현실은 우리의 밥상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다. GMO(유전자조작식품)은 이미 상용화돼 우리의 식단에 오르고,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각종 가공식품의 원료로 사용되고 있다. 이제는 그것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논의할 단계가 아니라 그 기술을 어떻게 올바로 사용해야 할지를 논의해야 할 상황이다. 생명복제기술이 지닌 위험성을 최소화할 수 있는 사회적 안전장치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생명윤리법안과 같은 법률적 장치 이외에 사회제도의 측면에서, 그리고 시민사회에서 노력할 수 있는 방안은 어떻게 찾을 것인가. 이런 문제들이 우리의 고민의 내용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답은 아직 우리에게 주어져 있지 않다. 그렇다면 답을 찾아야 할 텐데 가장 큰 문제는 그 문제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논의의 공간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유전자 조작식품으로 인한 위험성을 우리에게 알려줄 사람들은 누구이고, 그것의 안전성을 검사할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리고 그 쟁점에 대해서 우리는 어디에서 이야기해야 하는가. 이런 문제들을 지금 당장 논의해야 한다면, 또한 우리에게는 지금 당장 생명복제에 대한 공론의 장이 필요하다.

10) 정보과잉 시대의 해법

정보화시대라는 것은 우리시대를 규정하는 중요한 키워드다. 그렇지만 그 영향력이 강력한 만큼 여러 문제들을 낳고 있다. 많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익명성으로 인한 파괴적 언어의 출현, 인터넷 매체의 새로운 등장, 정보로부터 소외되는 계층의 최소화 문제 등이다. 그러나 정보화의 첨병인 컴퓨터와 인터넷을 체험하고 있는 우리에게 가장 큰 문제는 그 체험이 너무나 혼란스럽다는 것이다. 바로 현대인들이 너무나도 복잡한 대량정보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뿐만 아니라 상품에 대한 광고, 도로의 표지판, 간판, 그리고 각종 매스미디어를 통한 정보들까지 자신에게 필요한지 혹은 필요가 없는지 분간할 겨를도 없이 정보가 쏟아지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이러한 현상을 ‘정보과잉의 시대’라고 부른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정보를 모두 처리하려면 자신의 에너지 대부분을 쏟아넣어야 하고, 그렇게 되면 일이나 취미생활 등에 쏟을 여유가 없어지고 만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스트레스가 쌓여 출근 거부, 등교 거부… 심지어는 자살에도 이르게 된다. 이처럼 정보가 넘쳐 처리하기 곤란한 상황을 심리학자들은 ‘과잉부하환경’이라고 부른다.

밀그램이라는 사회심리학자는 과잉부하환경에 대처하기 위한 몇 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첫째, 중요하지 않은 자극은 무시한다. 예를 들면 배고플 때 거리에서 식당의 간판은 눈에 잘 들어오지만 그밖의 간판은 거의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

둘째, 각각의 자극에 대처하는 시간을 짧게 할 것. 접수창구의 아가씨들이 필요한 최소한의 말로 손님을 대하는 것이 이에 속한다. 하지만 위의 것들은 대처 방법이라기보다 현대사회, 좁게는 도시의 삭막한 인간관계를 설명해줄 뿐이다. 과잉된 정보의 그물에서 도망갈 수 없는 우리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그 많은 정보를 처리할 수 있는 메커니즘을 내면화하는 방법밖에 없다. 우리가 지식과 정보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주체적인 자리를 확보하지 못한다면, 그리하여 모두 자신의 작은 정보처리 용량에 담보 잡혀서 위처럼 살아간다면 정보화사회는 정보라는 무수한 모래알들에 파묻힌 사막일 수밖에 없다.

결국 우리가 체험하는 정보화의 현실은 개인적인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각자가 유익한 정보와 그렇지 않은 정보를 잘 분간할 수 있는 방법을 각자의 여건에 맞게 발견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그리고 그 방법을 얼마나 잘 찾아낼 수 있느냐에 따라서 정보화시대의 경쟁력의 차이가 발생할 것이다.

05-12-22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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