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존재에서 벗어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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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논술샘 작성일07-11-10 11:10 조회2,07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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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존재에서 벗어나기.
로빈슨 크루소는 외딴섬 무인도에 홀로 남겨졌다.
하지만 그는 단 한시도 사회적 존재로서의 자각을 잃어버린 적이 없었다.
사회에서 배운 지식을 활용하고. 어렵게 만든 필기구로 일기를 쓰며 사회로의 복귀를 준비했다. 그에게 있어서 사회는 그의 희망이며 생존의 원동력이었다.
그는 결국 자신의 희망대로 사회로 되돌아 올 수 있었고 그의 그러한 노력은 사회에서 인정받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사회는 당연이 그에게 부와 명예를 안겨 주었다.
하지만 사회가 모든 사람들에게 물과 공기와 같은 존재는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꿈과 행복을 앗아하는 것이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생명 마져 위협하기도 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로빈슨 크루소와는 반대의 길을 원하고 사회를 떠나 혼자만의 삶을 찾아 나서기도 한다.
그것마져도 용기가 없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좁은 방안에 가두어 버린다.
이런바 반 사회적 인물이나 사회성이 없는 사람으로 낙인 찍인 체....
이 들에게 한번 물어보자
사람은 사회적 동물입니까?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 하지 마슈.......
그럼 인간이 왜 사회적 존재인가?
그럼 아무래도 이 말을 직접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물어보는게 제일 나을것 같다.
그것만큼 확실한 답이 어디 있겠는가?
아리스토 텔레스 선생 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유?
아리스토텔레스 인간탐구.
그리스의 행복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웃나라에서 의사인 아버지를 둔 그리스 유학생이다. 부자집아들인 까닭에 그 당시 최고의 명문 학당인 플라톤의 아카메디아에 입학하여 아무 걱정없이 유학생활을 한 오렌지족인 셈이다.
유학생인 그에게는 아테네의 복잡한 정치현실도 스승의 냉철하고 이상적인 사상도 별 관심이 없었다. 아카데미아의 모습을 그린 그림에서도 그의 이러한 모습은 잘 나타나있다. 스승인 플라톤의 손 과 눈을 이상을 상징하는 하늘을 가르키고 있는 반면 같이 학당을 걸어나오는 아리스토 텔레스의 손은 땅 가르키고 있다. 고귀한 이상이니 복잡한 정치현실이니 하는 것은 그의 관심사가 못되었다. 당연이 그의 철학은 현실을 긍정하고 그 현실속에서 더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데 촛점이 맞추어져있다. 뭐 그리 아웅다웅하냐...적당이 지적이고 착한 일을 하며 양 극단을 피하며 중용의 삶을 사는게 행복이라고 주장했고 사회속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며 모나지 않고 두루 뭉실하게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이라고 주장한, 뭐 그리 특별한 것도 심오할 것도 없는 상식의 철학을 펼쳤다. 이른바 전형적인 부잣집 유학파 출신다운 상식과 지성과 웰빙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철학은 그의 제자인 알렉산드대왕의 동방원정으로 널리 전파되었다가 르네상스로 다시 유럽에 복귀하게 된다. 평생 유복하게 살면서 또 당대 최고의 철학자 스승과 당대 최고의 제자를 둔 복이 많은 철학자이기도 하다.
내가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고 한 것은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우위에 있기 때문이며 특히 언어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회적 능력이 뛰어 나다고 할 수 있슴다.
오직 인간만이 선악및 부정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있으며 이 감각이 가족과 국가를 성립케함다~
더욱이 전체는 필연적으로 부분에 앞섭니다...이건 말이죠 아주 중요합니다.....
따라서 국가는 개인에 앞서는 것이지여....
국가는 개인의 창조물이며 개인에 앞서있다는 증거는 개인이 고립되어 있을 때에는 자급자족을 하지 못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인간은 완전한 경우에는 동물 중에서 가장 훌륭하지만 법과 정의로부터 이탈하는 경우에는 최악으로 추락해 버리는 아주 위험한 존재란 말입니다....
따라서 사회는 반드시 필요하지 않습니까?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서 정리)
아리스토 선생의 말을 제대로 못들은 사람을 위해 다시 한번 정리해보자.
사람은 다른 동물보다 우월하다, 이 우월함으로 국가나 사회를 만들었다. 이 국가는 선악을 판단할 수있는 인간이 만든 것이므로 덕이 있는 것이다. 그런나 사람은 불안전하여 법과 정의로부터 이탈하는 경우 최악으로 추락하기 때문에 정의로운 존재인 국가가 개인보다 더 앞서는 것이며 사람은 이 국가를 떠나서는 살 수가 없다.
한마디로 개인보다 국가가 더 정의로운 존재라는 전재를 깔고 있다.
그럼 이 말로 가장 피해를 보았다고 주장하는 마광수 교수의 반론으로 이 말에 대한 비판을 대신해 본다.
마광수 교수는 그의 소설 즐거운 사라가 노골적인 성적 묘사로 인해 사회적으로 음란성을 부추겨 청소년들에게 악영향을 끼친다는 이유로 음란물 유포죄로 구속당하고 교수직에서 쫒겨 나기도 했다. 최근에 다시 복직했으나 그의 홈페이지에 올린 글이 음란한 내용이라는 이유로 또 한번 기소될 위기에 처해 있다.
모든 인간이 반드시 사회적 동물인 것은 아니다.
어찌보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처럼 인간을 불행에 빠뜨리는 교언도 없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정의는, 인간이 사회라는 부자연스러운 조직과 굴레에 갇혀 여러 가지 규율과 제도, 법등에 얽매여 살아가는 것을 누구나 생리적으로 원하고 있는 것처럼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 개개인의 자유 추구와 행복추구를 은연중 부정해 버리는 일면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개인’보다 ‘전체’를 우위에 놓고서 모든 이상을 가꿔가게 만들고, ‘전체’라는 애매모호한 의인물을 위한 개인의 희생이 당연하다는 식의 생각을 합리화 시켜 버리게 만든다.
인간은 사회라는 조직에 당연이 예속되는 부속품이 아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이전에 ‘개인적 동물’인 것이다.
인간이 사회를 형성하게 된 것도 단지 편의상의 일시적인 방편에 불과하다.
중략~
인간이 소집단을 형성한 것은 오직 ‘사냥의 효율성과 ’맹수로부터의 안전 확보‘ 를 위한 일시적인 계약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집단적 안전유지를 꾀하다 보니 그 가운데 강자가 나타나 ’권력‘을 도모하게 되었고 , 따라서 인간 개개인은 맹수나 천재지변으로부터 받는 위협보다 ’권력자‘로부터 받는 위협에 더 시달리게 되었다.
그러므로 내가 보기에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기보다 사회를 두려워하거나 싫어하는 동물에 더 가깝다.
인간이 사회를 싫어하는 동물이라는 증거는 인류사상사의 괘적을 면면히 살펴보면 잘 알 수 있다. 인류의 사상사는 한마디로 말해 ‘사회’를 ‘개인’보다 우위에 두는 그룹과 ‘개인’을 ‘사회’보다 우위에 두는 사상가 그룹사이의 투쟁사이기 때문이다. 인류의 사상사는 ‘사회’를 부정하는 개인주의자들을 대부분‘아웃사이드’로 배척하여 희화화시켜 버렸다.
동양의 양주나 장자 같은 이들이 그러하고 서구의 에피쿠로소나 사드같은 이들이 그러하다.
이들은 대게 개인적인 삶의 실현과 개인적 쾌락의 실현에 생의 가치를 두었다.
중략~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확실이 검증되지도 않은 명제 때문에, 가족이니 국가니 민족이니 하는 말들이 일종의 신성 불가침한 개념으로 민중들에게 주입되었다. 그러다 보니 가부장제도 하에서 가족 개개인의 인권 말살이 당연시 되었고, 가족과 국가의 개념이 합쳐지면서 힘을 가중시켜 충효 사상 같은 것이 독재와 수탈의 수단으로 기능하게 되었다.
또한 민족 지상주의나 국수주의적 전체주의가 등장하여 개성 압살과 호전 사상의 전천후적 무기로 위세를 떨치기도 하였다.
우리가 앞으로 중시해야 할 것은 ‘개인의 소중함’이다. 모든 개인은 원래부터 다른 것이 당연하고. 그 다른점을 서로 인정해 주려고 노력하는 것이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내가 지금까지 여러 글에서 ‘야한 여자’ 또는 ‘야한 사람’을 강조했던 것은 그런 뜻에서 였다.
인간은 절대로 사회적 동물이 아니다. 그보다는 차라리 ‘개인적 동물이고 고독을 즐기는 동물이다. 아무리 괴팍해 보이는 유아 독존적인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의 고립이 정당한 대접을 받게 될 때. 인류는 자신들도 모르게 자초하게 되는 집단자살이나 집단 살상의 엄청난 비극으로부터 구제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마광수 교수의 반론이 다 옳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오늘날의 인간들을 사회적 존재로 규정하는 것은 시대적으로 맞지 않는 구시대의 유물인 것만은 확실하다.
미래 학자 엘빈 토플러는 얼마 전 인터뷰에서 오늘날 사회는 대중 사회에서 개인 사회로 변화하고 있슴을 강조하였다.
학교 교육에서 개성을 강조하고 회사에서 개인의 창발성을 강조하고. 다원화된 사회에서 소수의견을 중시하는 모든 것으로 바로 이러한 변화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증거이다.
이제 국가나 사회가 더 이상 사회적 가치 공동체적 가치 집단적 가치로 개인의 자유를 구속하고 행복을 억압하는 기구가 되어서는 안된다.
교통 통신의 발달로 인류의 이동성이 강화된 세계화의 시대에 더 이상 낡은 공동체의 가치로 개인을 억압하는 것은 그 개인들에게 더 이상 그곳에 남아 있을 이유를 없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노자의 말대로 북을 두드려 양을 찾는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관련논제..고려대 2000년 정시
★다음 예시문을 읽고 논제에 답하시오.
(가) 제도는 인간의 생식과 보호, 생계 유지와 같은 중요한 문제를 다루는 형식이다. 그것은 인간 상호간에 규칙적이고 지속적인 협력을 요구하며, 다른 한편 안정된 권력이 된다. 제도는 본래 불안정한 존재인 인간들이 서로 견뎌내고 믿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찾아낸 형식이다. 제도 안에서 삶의 목적이 공동으로 추구되고 우리가 무엇을 하고, 하지 말아야 되는지를 결정할 수 있도록 도움을 받으며 내적 삶의 안정을 획득한다. 그리하여 제도는 우리가 항상 격렬하게 대립해야 하는 부담과 기본적인 문제에 대하여 결정해야 하는 부담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제도는 개인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존재하며, 개인은 그 제도 안에 편입되어 있다. 따라서 개인은 사실상 사유재산이나 결혼과 같은 제도를 개인적 차원을 넘어선 행동양식으로 체험한다. 제도는 그 구성원이 바뀌는 것에 관계없이 오래 전부터 지금까지 존속하고 있는 것으로 개인에게 의식되며, 개인은 그런 의식을 가지고 직업, 관청, 공장과 같은 제도 안으로 들어온다. 인간이 함께 살아가고 함께 일하는 형식들 안에서 지배가 형성되고 정신적인 교류가 이루어지는데, 이러한 형식들이 결국은 그 자체로 중요성을 지닌 제도가 되고, 이 제도가 개인에 대하여 권력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회체제 내에서 개인이 차지하는 위치가 어디인지,또 어떤 제도에 그 개인이 편입되어 있는지를 안다면 개인의 행동을 비교적 확실하게 예측할 수 있게 된다. - (아놀드 겔렌, <인간학적 연구>)
(나) 아도르노 :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인간을 지배하는 제도로부터 비롯된 이 권력은 철학의 용어로 '타율적'이라고 불립니다. 제도는 인간과 맞닥뜨려 있는 낯설고 위협적인 권력입니다. 당신은 불안정한 인간의 본성 때문에 그와 같은 불행을 운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이 서로를 믿지 못하여 제도의 권력을 용납하게 된 것은 비판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제도가 변경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인간에게 엄청난 중압이 되어 개인을 말살하는 위협적인 것이 되고 마침내는 인간의 자유로운 활동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는 것이 되는지 물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제도가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생겨날 수밖에 없는 것인지, 아니면 경우에 따라서 변경될 수도 있는 역사적 발전의 산물인지 물어야 할 것입니다.
겔렌 : 동감입니다. 가족, 법, 결혼, 사유재산 등과 같은 인간의 근본적인 제도나, 경제는 역사상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제도는 언젠가 해체되어버릴지도 모릅니다. 아마 계속 바뀌겠지요. 그러나 당신은 그 이상으로 묻고 있습니다. "왜 겔렌은 제도를 옹호하느냐"라고 말이죠.
아도르노 : 오해하지 마십시오. 나 역시 어떤 점에서는 제도를 옹호합니다. 오늘의 상황에서 우리가 당면한 문제 해결의 열쇠는 인간을 지배하는 제도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 다른 결론에 도달하는 것 같습니다.
겔렌 : 좋습니다. 어디 봅시다. 우리는 어쨌든 논쟁점을 찾아야 합니다. 나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찬가지로 안전의 관점을 중요시하는 편입니다. 제도는 인간이 스스로 멸망할 수도 있는 것을 막고 인간이 서로 해치는 것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장치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자유는 제한되지요. 그러나 혁명가들은 계속 있었습니다.
아도르노 : 당신이 강조하는 것처럼, 인간이 제도 아래에서 갖는 책임이란 순응과 복종의 형태를 띨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강조하듯이, 인간이 자기 실현의 가능성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책임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잠재해 있는 인간 실현의 가능성을 방해하는 것에 맞서는 것이 책임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제도에 대한 순응은 인간을 심각하게 기형화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지요. 인간의 잠재력은 제도에 의해서 억압되고 불구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겔렌 :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비슷한 연배이고, 다같이 네 번의 정부 형태, 세 번의 혁명, 두 번의 전쟁을 겪었지요. 그 동안 많은 제도가 무너지고 없어졌습니다. 그 결과는 인간의 전반적인 내적 불안정입니다. 내적인 동요지요. 이사실은 이제 명백하고 공개적인 것이 되었지요. 제도를 보존해야 한다는 것에 나는 찬성입니다. 인간은 제도를 어느 정도 개선할 수는 있지만 새로 시작할 수는 없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제도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되고, 그 대가로 상당히 많은 제약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아도르노 : 그건 나도 인정합니다. 내 견해는 다만 그로부터 얻은 성과가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오늘날 기계 장치의 한 부속품이지 자신을 지배하는 주체가 아닙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인간이 더 이상 쓸모 없는 부속품이 되지 않도록 세계가 이루어지고, 인간을 위해서 제도가 존재하고, 인간이 만든 제도를 위해서 인간이 존재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제도가 인간 본성을 반영하고 있다는 말만으로는 별로 위안이 되지 않습니다.
겔렌 : 엄마의 앞치마에 몸을 숨기는 아이는 불안과 동시에 다소간의 안전을 느낍니다. 당신은 물론 성숙의 문제를 논하려 하겠지요. 우리가 자유롭기 위해, 당신은기본적 문제에 대한 결정을 제도에 맡기기보다 인간 스스로 하게 하고, 그로 인해 불가피하게 제기되는 시행 착오와 삶의 과오를 감수하도록 모든 인간에게 요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아도르노 : 그렇습니다. 나는 객관적인 행복과 객관적인 절망에 대한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결정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 한, 이 세계 내에서의 안녕과 행복은 하나의 허상임을 나는 말하고 싶습니다. 이것이 깨어질 때는 심각한 결과가 초래될 것입니다.
겔렌 : 이제 우리는 분명히 당신은 '예', 나는 '아니오'라고 말하는 지점에 도달했습니다. 지금까지 말한 것에 비추어 보면 당신은 인간 중심적이며 이상주의적입니다.
아도르노 : 나는 그렇게 이상주의적이지 못합니다. 인간이 처한 곤경은 제도에 의해서 지워진 부담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인류의 근원적인 문제로 보입니다. 인간은 그들에게 재앙을 가져온 바로 그 권력의 품안으로 도망치려 합니다. 심층 심리학의 표현을 빌린다면, 자기 자신을 '공격자와 동일화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당신 자신도 두려워하는 바로 그 권력과 자신을 동일화하고 있습니다.
겔렌 : 나는 반대 견해를 피력하고자 합니다. 당신은 아직 인간의 손에 남아 있는 약간의 것마저도 인간으로 하여금 불만스럽게 여기도록 만들고 싶어합니다. 그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아도르노 : 그렇다면 그것에 대하여 바로 이런 말을 인용하고 싶습니다. "오직 절망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 - (프리드리히 그렌츠, <아도르노의 철학> 중 'A.겔렌과 T. 아도르노의 논쟁')
<논제> 제도(制度)에 관한 겔렌과 아도르노의 주장을 밝히고, 그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되, 반드시 예시문에 언급된 여러 제도 가운데 하나를 택하여 논술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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